일본 프리미어12에서 최강 위상 재확인…대만 기세뿐 아니라 실력으로도 짜임새
프리미어12에 나선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일본을 상대로 2패만을 기록했다. 결승전 마지막 아웃카운트에서 한일 양국 선수들의 희비가 갈린 모습. 사진=연합뉴스
소득은 있었다. 한국은 5위에 그친 대만을 누르고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 걸린 단 한 장의 올림픽 진출권을 따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12년 만에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의 준우승에 유독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일본과 대만 가운데 어느 팀도 꺾지 못해서다.
#일본과 대만 사이를 오가는 한국
한국, 일본, 대만은 오랜 시간 야구로 질긴 인연을 맺어왔다. 특히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은 ‘한 수 위’ 일본과 ‘한 수 아래’ 대만 사이에서 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라이벌’이라는 관계는 무척 신비하다. 한국은 늘 일본을 만날 때마다 실력 이상의 경기를 펼쳤고, 대만 역시 한국만 만나면 기량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두 배로 긴장했다. 일본과 대만 양국이 모두 “한국은 무조건 꺾는다”는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국제 무대에서 한국과 일본의 ‘숙적’ 관계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순간마다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으며 팽팽한 라이벌전을 펼쳤다. 그러나 대만은 한국이 드러내 놓고 라이벌이라 표현하지 않았을 뿐 늘 빼놓지 않고 신경 써야 하는 ‘난적’으로 여겨졌다.
한국은 프로 선수가 참가하기 시작한 1998 방콕아시안게임부터 올해 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까지 대만과 총 38경기를 치러 23승 15패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프로 최정예 멤버가 참가한 국가대표 경기로 범위를 좁히면 19경기 15승 4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한다. 특히 2007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 이후에는 9연승을 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전을 앞두고 한국 선수단은 늘 긴장한다. 몇 안 되는 패배가 한국에 큰 충격을 안겨서다. 특히 2003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은 예선 1차전에서 대만을 만나 연장 10회 접전 끝에 4-5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그 결과 2004 아테네 올림픽 티켓을 놓쳤다. 또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예선에서 대만에 2-4로 패하면서 금메달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두 대회는 한국 야구 국가대표 역사에서 ‘참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끝내 승리로 이어지긴 했어도 내용상 진땀을 흘린 경기도 많았다. 특히 프로 선수들의 병역 대체 복무 혜택이 걸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주로 그랬다. 한국은 1998년 방콕 대회와 2002년 부산 대회 결승전에서 대만을 상대로 1점 차 힘겨운 승리를 따냈다. 안방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에서도 마찬가지. 경기는 6-3으로 끝났지만 7회까지 2-3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심지어 7회에는 무사 만루 위기를 무실점으로 간신히 막고 넘어가기도 했다. 8회초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지 않았다면 금메달이 날아갈 뻔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1회 7점을 뽑고도 6회 8-8 동점을 허용하며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결국 9-8 한 점 차로 겨우 이겼다.
한국은 지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이어 프리미어12에서도 대만에 패하며 충격을 안았다. 대만전 선발로 나서 고전한 김광현. 사진=연합뉴스
#한국을 따라잡은 대만
최근 기류는 더 좋지 않다. 이전에는 ‘기세’에서 밀렸다면, 최근에는 ‘실력’으로도 이기기 버거워지는 모양새다.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은 선동열 감독이 초대 국가대표 사령탑에 오른 뒤 처음으로 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한 공식 국제대회였다.
하지만 첫 판부터 대만에 1-2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대만 대표팀이 이전처럼 최정예 멤버를 꾸리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에이스 양현종을 내보내고도 은행원 출신 대만 선발투수와 실업 야구에서 뛰는 불펜 투수들에 밀려 점수를 뽑지 못했다. 느슨해졌던 한국 야구에 다시 한 번 ‘대만 경계령’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심지어 이번 대회에서는 아예 0-7로 참패하는 굴욕을 맛봤다. 또 다른 대표팀 에이스 김광현이 3⅓이닝 3실점으로 조기 강판했고, 타선은 투수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된 대만 선발을 공략하지 못했다.
대만은 오랜 시간 한국에 “투수력과 수비가 약하고 타격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대신 큰 것 한 방이 있는 팀”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2017년 24세 이하 프로야구 선수들이 출전하는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을 기점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김경문 대표팀 감독도 이번 대회 경기 전부터 “과거에는 대만이 ‘한 방만 조심하면 되는 팀’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수비도 탄탄해졌고 투수도 많이 좋아졌다. 예전보다 확실히 짜임새를 갖췄다”고 경계했다. 그 우려가 경기 내용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대만은 기본적으로 ‘타도 한국’을 외친다. 한국이 “한일전에서는 가위 바위 보도 지면 안 된다”는 각오로 일본과 맞선다면, 대만이 한국을 상대로 비슷한 마음을 품는다. 점점 위로 치고 올라오는 대만 야구의 힘을 한국이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아시아 최강국 위용 굳혀가는 일본
일본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아시아 야구 최강국이다.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대표팀 이름에 걸맞게 모든 국제대회에 비장한 각오로 임한다. 심지어 24세 이하 선수들이 출전하는 2017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시리즈에도 와일드카드 3장을 모두 사용해가며 최상의 멤버를 꾸렸다. 일찌감치 국가대표 전임감독제를 도입한 일본은 고쿠보 히로키 전 감독이 2015 프리미어12와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우승에 실패하자 사령탑을 교체했다. 현재 지휘봉을 잡고 있는 이나바 아쓰노리 감독이다.
일본 야구의 ‘구원투수’로 낙점된 이나바 감독은 ‘어떤 야구를 하겠느냐’는 일본 취재진 질문에 늘 “이기는 야구”를 외친다. 이번 프리미어12를 앞두고도 이나바 감독은 그 어느 나라 사령탑보다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안방에서 열린 2015년 초대 대회 준결승에서 한국에 9회 통한의 역전승을 허용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어서다. 베이징올림픽 때는 선수였고 2015년 대회 때는 대표팀 타격코치였던 이나바 감독은 “그때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했다. 그 마음을 원동력 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왔다”며 “도쿄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각오를 내놨다.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아시아 최강국의 위상을 재확인했다. 한국과 첫 경기에선 예상 외로 마운드가 무너지면서 1-7로 앞서던 경기를 8-10까지 추격당했지만, 결승전에선 투타 모두 스코어로 나타난 수치보다 더 확연한 우위를 뽐내면서 무난하게 승리했다. 객관적인 전력상 확실하게 우위에 있는 일본에 패했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 야구의 냉정한 현실을 맞닥뜨렸다는 점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세 국가의 최종 목표는 2020년 도쿄올림픽이다. 프리미어12는 올림픽을 향한 전초전에 불과했고, 이 대회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한 대만은 세계 예선에서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도쿄에 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오랜 기간 치열한 삼국지를 그려온 일본, 대만과 승부에서 미래의 방향성과 현재의 현실을 엿봤다. 9개월 뒤 다시 금빛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한국 야구에 묵직한 숙제가 생겼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