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공부 잘해 또래 선임들의 시샘 대상 100km 행군 뒤 경계 근무중 탕!…군 수사 조작 정황도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했다. 매월 진상규명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일요신문] 이등병 A 씨는 1982년 8월 22세에 입대했다. 키 184cm에 유도 2단의 유단자였다. 고등학생 때 레슬링까지 배워 몸이 크고 다부졌다. 그래서인지 A 씨는 경기도 연천에 있는 한 부대의 화기소대에 배치됐다. 보직은 60mm 박격포 탄약수였다.
#선임들의 ‘타깃’ 된 이병
A 씨는 소대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운동을 잘했던 A 씨는 부대 체육대회 때 족구와 배구 선수로 출전해 팀에 큰 힘이 됐다. 공부도 잘했다. 명문대 법학과 학생으로 판·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A 씨는 ‘과묵한 가운데에도 유머가 있으며 리더십이 강한’ 사람이었다.
184cm 키에 유도 2단, 레슬링으로 단련한 A 이병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한 부대의 화기소대에 배치됐다. 보직은 60mm 박격포 탄약수였다. 박격포 훈련을 마친 장병들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
시샘이 따라붙었다. 또래와 비교해 조금 늦게 군에 온 탓에 선임과 나이가 같거나 많았던 A 씨는 ‘타깃’이 되기 딱 좋았다. 선임들은 밤에 따로 A 씨를 불러내 군기를 잡았다. 피부가 울긋불긋한 개구리를 입에 물리고 연병장 ‘뺑뺑이’를 돌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입 한 달도 안 됐을 때였다.
A 씨는 한시도 마음 편할 수 없었다. 소대 선임들은 틈만 나면 A 씨를 다른 소대 선임들과 씨름 시합을 붙였다. “똑바로 못 하냐 씨X놈아.”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국물도 없어.” 패하면 같은 소대 선임에게 욕먹고 이기면 다른 소대 선임에게 욕먹었다.
동기였던 이 아무개 이병은 “유독 망인을 시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망인이 가만히 있는데 덩치 큰 고참이 와서 ‘야 너 씨름 잘한다며, 나랑 한번 붙어볼까’라며 발로 때리는 식으로 못살게 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4박 5일 유격훈련 이어 100km 행군 19시간 만에 주파
위축될 대로 위축된 A 씨가 마지막을 맞은 날은 1982년 11월 13일이었다. 그날은 A 씨가 속한 10중대가 100km 연대 측정 행군에서 1등을 한 날이기도 했다. “죽도록 힘든 날”이었다. 측정 행군은 중대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과 같았기 때문이다.
행군은 4박 5일 유격훈련이 끝나고 곧바로 시작됐다. 10중대는 11월 12일 오후 3시쯤 출발해 다음 날인 11월 13일 오전 10시께 복귀했다. 100km를 19시간 만에 주파한 셈이다. 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밥 먹는 시간 빼곤 줄곧 걸었다. 낙오자도 심심찮게 나왔다.
당시 김 아무개 소대장은 “60km를 걸으면 발이 쓰라리기 시작하고, 80km를 걸으면 물집이 터지기 시작하며, 마지막 10km는 다들 쩔뚝거리며 걷는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60mm 박격포 탄약수였던 A 씨는 부담이 더 컸다. 소총과 완전군장 20kg에 60mm 박격포의 포탄을 추가로 짊어지고 걸어야 했다. 첫 행군은 그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발에 잡힌 물집이 터졌지만 바늘과 실로 응급처치를 하고 계속 걸었다. 행군이 끝나갈 무렵엔 동기가 등을 떠밀어 줘서 걸을 정도로 상태가 위태로웠지만, A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낙오율 0%의 비결, “행군 낙오하면 돌아가면서 맞아”
화기소대는 유독 군기가 셌다. 낙오율이 0%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대원 한 명의 낙오는 소대 전체 낙오를 의미했다. 낙오자의 군장과 장비를 소대원이 나눠들어야 했는데, 그럴 경우 연쇄 낙오로 이어졌다. 당시 이 아무개 중대장은 “화기소대는 장비가 더 있지만 단결력이 강해 낙오하는 경우가 없었다. 낙오는 다른 소대에서 나왔다”고 회상했다.
군부대 훈련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낙오율 0%의 ‘비결’은 구타였다. 화기소대였던 남 아무개 일병은 “거의 매일 고참들에게 폭행, 얼차려를 당했는데 특히 행군 낙오를 하면 고참들에게 돌려가면서 맞았다”고 전했다.
화기소대를 비롯해 부대 전체에 가혹행위가 만연했다. 화기소대 선임하사는 빨래해서 널어둔 자신의 전투복 바지가 없어졌다고 소대를 집합시켰다. 2시간 동안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 ‘원산폭격’을 시켰다. 머리가 팅팅 부을 때쯤 취사병이 바지를 가져왔다고 한다.
졸병은 자유롭게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동기끼리라도 대화하다가 걸리면 “온 지 얼마 안 된 새끼들이 군기 빠져서 노닥거린다”며 난리가 났다. 박 아무개 이병은 “말도 못 하게 두들겨 맞아” 고막이 나가기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점호 땐 관물대에 발 올리고 머리를 박는 등 1시간 정도 얼차려를 받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A 씨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훈련 끝난 당일 야간 경계 근무 투입
11월 13일 오전 10시께 6일간의 대장정이 끝났다. A 씨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저녁 10시부터 11시까지 야간 경계 근무에 투입됐다. A 씨는 함께 근무 나간 김 아무개 병장과 상황실에 가서 실탄 15발이 든 탄창을 지급받았다. 김 병장은 일자형 중대 막사의 중앙 부분 경계호에서, A 씨는 막사 후면에 있는 방벽호에서 각각 경계 근무를 섰다.
근무가 끝나갈 무렵인 밤 10시 55분이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A 씨는 자신의 M16 소총을 방벽호 벽에 거치한 뒤 오른 가슴에 갖다 댔다. 조종간을 자동으로 풀고 오른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눌렀다. 탄환은 오른쪽 흉부를 관통해 왼쪽 등 뒤로 빠져나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A 씨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숨을 멈췄다. 불과 입대 42일 만이었다.
군 헌병대는 보직에 불만을 느끼던 A 씨가 평소 앓던 관절염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추정했다. 전입 동기인 신OO 이병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A 씨가 지니고 있던 소염진통제인 ‘안티푸라민’ 1통과 ‘아스피린’ 10정도 주요 근거가 됐다.
신 이병은 군 헌병대 조사에서 “망인이 탄약수로 보직되어 근무하기 힘들다고 자주 말했다. 1982년 10월 2일과 10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행정병으로 보직을 받게 해달라고 부친과 함께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을 먹어오던 관절염을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답했다.
#군인 출신 부친 매일 소주 5~6병씩, 결국 사망
유가족은 군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22세 운동 좋아하는 아들은 관절염을 앓지 않았다. 안티푸라민과 아스피린은 상비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5년 전 상사 전역한 A 씨 아버지는 아들을 행정병으로 보직 변경할 힘도 없었고, 시도한 적도 없었다.
타살이나 사고사를 의심했던 A 씨 아버지는 1999년 7월 국방부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국방부 재조사 결과도 전과 같았다. 타살이나 사고사 흔적은 없었다. 방어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물론 A 씨 몸엔 근접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분명한 자해 사망이었다. 국방부의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A 씨 가정은 풍족하진 않았지만 화목했다. 가족 모두가 신앙생활을 함께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던 A 씨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뒤부터 매일 소주 5~6병을 마셨다. 결국 1999년 11월 1일 급성간염으로 사망했다. A 씨 형은 한 명 있던 동생을 잃은 충격에 현재까지도 정신장애를 앓고 있다. A 씨 형과 치매 걸린 어머니는 기초생활비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결정적 진술 기록 없어, 당시 군 수사 조작 정황
보다 못한 A 씨의 작은아버지가 지난해 9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진실규명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부대원들과 간부 등 13명을 직접 만나고 29명과 전화 통화를 했다. 앞선 두 조사에서 나오지 않았던 가혹행위 사실이 결국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전히 타살이나 사고사는 아니라고 분석됐다.
위원회는 당시 군 헌병대가 수사를 조작한 정황도 포착했다. A 씨 사인을 판단하는 결정적 진술을 했던 전입 동기 신OO 이병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부대에 없는 사람이었다. 조작이 의심되는 지점이다. 결국 위원회는 신체 건강했던 A 씨가 군 부조리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최종 판단했다. 부대 관리가 적절치 않았다는 지적이다.
A 씨 사건을 규명한 이석주 조사관은 “군은 이전 두 차례 조사에서 정작 중요한 사망 원인에 대한 진실규명보다는 타살 혐의점 유무에 대한 수사만 진행했다. 이번 수사에서 당시 가혹행위가 드러났다”며 “앞으로도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진실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