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군에선 “부친 지병에 업무 부담감 탓”이랬지만 간부에게 지속적 괴롭힘 당해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 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은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진상규명이 된 13건 가운데 6건을 발표했다. 발표되지 않은 나머지 사연을 일요신문에서 연재한다. |
[일요신문] 1997년 3월 18일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4시 50분께 주·부식이나 피복 등을 쌓아둔 보급창고 문이 열렸다. 임춘구 일병이었다. 불침번 근무를 끝내고 내무반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후번 근무자에게 “화장실에 간다”고 말한 뒤 보급창고를 찾았다.
복도에 불이 꺼진 터라 캄캄한 창고에는 옅은 빛조차 새어들지 않았다. 어둠은 두 달 전부터 보급 업무를 담당하던 임 일병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창고 안으로 들어간 임 일병은 열쇠뭉치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군화 끈 끝에 열쇠뭉치를 달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녔다. 고심 끝에 병기함을 연 임 일병은 얼마 전 전역한 선임의 K2 소총을 꺼낸 뒤 높이 30cm 탄창 보관 박스에 걸터앉았다.
2005년 전방총기난동사건 당시, 동료를 잃은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경북 안동의 부모님과 형, 누나 생각에 잠시 뜸들였을 임 일병은 이내 실탄 네 발을 탄창에 꽂았다. 임 일병은 소총을 양다리 사이에 세우고 고개를 숙여 총구를 물었다. 오른 엄지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조종간 ‘안전’을 해제했다. 그리곤 방아쇠를 지그시 눌렀다. 새벽 5시께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네 발의 총알은 보급창고 슬레이트 지붕을 뚫고 하늘로 향했다. 옅은 네 줄기 빛이 창고로 흘러들었다.
군 헌병대는 임춘구 일병이 위암에 걸린 아버지 병세를 비관하던 가운데 업무 부담감까지 더해져 자해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헌병대는 임 일병이 사건 석 달 전인 1996년 12월 사격 연습 때 실탄 네 발을 숨겨둔 뒤 자해 사망에 사용했다고 봤다. 당시 부대 간부들이 ‘은닉탄’으로 메우고 실탄 분실을 무마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군의 설명은 개운치 않았다. 군에서 실탄 네 발이 분실됐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임 일병과 함께 근무했던 김 아무개 병장은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 조사에서 “실탄이 사라졌는데, 찾은 기억은 없다”고 진술했다. 또 임 일병 아버지는 당시 위암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회복한 상태였다. 임 일병이 휴가 나갔을 때 아버지는 농사일을 할 만큼 기운을 차린 뒤였다.
사건이 일어난 뒤 임 일병 형 춘우 씨는 동생 부대를 찾았다. 육군본부 대위였던 사촌동생과 함께 부대를 방문했지만 중대장 얼굴도 보지 못했다. 부대 선임 병장이 나와 대략적인 상황을 안내할 뿐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형 춘우 씨는 당시 헌병대 조사 결과조차 통보받지 못했다.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니 항의할 수도 없었다. 2018년 12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하기까지 22년 동안 그저 동생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임춘구 일병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180cm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였지만 잘 웃고 거절을 못 하는 성격 탓에 집에선 항상 눈 뜨고 코 베이진 않을지 걱정했다. 소년 춘구는 열 살 차이 나는 큰형을 유독 잘 따랐다. 입대 전 넉 달 동안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친 큰형을 간호하기도 했다.
대구의 한 전문대학 전산학과를 졸업한 스물한 살 청년 춘구는 1996년 4월 14일 9사단 신병교육대로 입소한다. 두 달 뒤인 6월 10일 의정부 한 방공부대에 탄약관리병으로 전입한다. 집에서 귀여움을 받던 막내아들 임춘구 일병은 부대에서도 사랑받았다. 부대 선임들은 잘 웃고 책임감 강한 그를 좋아했다.
당시 최고선임이었던 김 아무개 병장은 “춘구는 행정반 마스코트로 불리며 선임들에게 사랑받았고, 하회탈같이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공 아무개 병장은 임 일병을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고, 공동의 일까지 맡아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임 일병은 ‘잘 안 풀린 군번’이었다. 군 생활 11개월 동안 후임이 딱 한 명 들어왔다. 허드렛일을 다 해야 하는 위치였던 셈이다. 임 일병은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해나갔다. 탄약관리병이었지만 전산학과를 나왔다는 이유로 행정반 업무까지 도맡아 했다. 밤낮으로 탄약고 경계 근무를 섰고, 내무반 불침번 근무도 빠지지 않았다. 점호 시간 때 청소를 빼먹지도 않았다.
임 일병은 부대 선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문제는 부대 간부였다. 부대엔 요주의 인물 두 명이 있었다. 행정보급관 박 아무개 상사와 송 아무개 중사였다. 박 상사는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박 상사는 모든 부대원들에게 “일단 피하고 보는 대상”이었다.
행정반 업무를 담당하던 임 일병은 박 상사에게 매일같이 욕설과 폭언을 들었다. 사건 한 달 전인 1997년 2월 부대 보급병이 타 부대로 전출 가자 그 빈자리를 임 일병이 메우면서, 박 상사는 그를 더욱 세차게 몰아세웠다. 특히 보급품 개수 파악이 잘못되면 가차없이 큰소리를 냈다.
“안동 촌놈의 새끼가 일도 제대로 못 하느냐”,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너 이 새끼가 일을 제대로 하는 걸 못 봤다”, “대학 나온 놈이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느냐” 등 박 상사의 폭언 수준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전투복 다림질 등 박 상사의 개인적인 업무 또한 임 일병 몫이 됐다.
아무리 보급품 개수 파악을 꼼꼼하게 해도 오류가 발생했다. 누군가 보급품을 빼돌리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던 임 일병은 전전긍긍했다. 입대 전부터 합기도를 수련해 체력이 좋았던 그는 선임 김 아무개 병장에게 “차라리 영선반에서 계속 육체적인 노동만 했으면 좋겠다. 보급 업무는 너무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복병은 박 상사뿐이 아니었다. 총기·탄약 관리 등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송 아무개 중사는 점호 시간이면 부대원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다. 임 일병도 그 대상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당시 부대원들에 따르면 송 중사는 관물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꼬투리를 잡아 임 일병 볼에 뽀뽀하고, 성기를 만지고, 젖꼭지를 꼬집는 등의 행위를 지속적으로 일삼았다. 송 중사는 임 일병이 사망한 뒤 헌병대 수사에서 성추행 등 가혹행위 사실이 밝혀져 1997년 4월 구속 송치돼 상해·폭행 혐의로 처벌받았다.
2018년 9월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출범식에서 이인람 위원장이 출범선언서를 읽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임춘구 일병 사건 진정을 2018년 12월 접수한 뒤 지난 2월부터 5개월 동안 4명의 참고인을 면담하고 14건의 기록을 분석하는 등 사건을 재조사했다.
위원회는 임 일병이 사용한 실탄 네 발의 출처를 명확히 알아내진 못했지만 그가 지속적인 가혹행위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단 사실을 밝혀냈다. 위원회는 전문가에게 의뢰해 사후 정신검증을 진행했다. 그 결과 부대 안에서 행해진 부조리가 임춘구 일병을 자해 사망으로 이끈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임춘구 일병 사건을 조사한 김을룡 조사관은 “특이하게도 부대 선임이 아닌 부대 관리 책임이 있는 간부가 병사에게 가혹행위를 가한 사건이다. 망인이 느꼈을 절망감을 상상하면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며 “영문도 모르고 아들, 동생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도록 할 것”이라고 답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