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관 퇴근하면 선임 ‘갈굼’…하루 14시간 근무, 주 1회도 제대로 못 쉬어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 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은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진상규명이 된 13건 가운데 6건을 발표했다. 발표되지 않은 나머지 사연을 일요신문에서 연재한다. |
[일요신문] 1998년 10월 8일 오전 11시, 그날은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날이었다. 조리병이었던 안성현 씨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취사장(병영식당) 청소에 나섰다. 안 씨는 이내 취사장에서 25cm쯤 되는 회칼을 꺼내 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부대를 옮긴 뒤 12일 만이었다.
A 복지회관에서 B 복지회관으로 전출된 안 씨는 새 환경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 부대 최고선임 조 아무개 병장의 은근한 괴롭힘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조 병장이 안 씨에게 다가왔다. 조 병장은 고무장갑으로 안 씨 안면부를 때린 뒤 “전 부대에서 이따위로 했느냐, 돌아가서 잠이나 자든지 네 맘대로 해라”며 어깨를 밀쳤다.
2018년 9월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출범식에서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이종현 기자
안 씨는 순간 꾹꾹 눌러온 스트레스와 절망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일이 벌어진 건 순간이었다. 그의 목 여섯 군데 자상에서 피가 쏟아졌다. 조 병장과 그 광경을 지켜보던 후임 한 아무개 일병이 달려들어 지혈했지만 출혈을 멈출 수 없었다. 칼자루를 쥐고 요리사 꿈을 키웠던 안 씨의 마지막이었다.
사건을 수사한 군 헌병대는 안 씨가 ‘개인적인 일’로 자해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민하던 시기에 타 부대로 전출된 안 씨가 부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부대 내 구타나 가혹행위 등 부조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결론은 달랐다. 위원회는 지난 2월부터 7개월 동안 당시 부대 관계자 13명을 대상으로 사건을 재조사했다. 위원회는 구타와 가혹행위, 법규를 위반할 정도로 과중한 업무가 안 씨를 자해 사망으로 이끈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밝혀냈다. 과수원을 했던 안 씨 집은 IMF 외환위기 시절 남들처럼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죽음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집안 기둥이었던 아들이 사라지고 가정은 공중분해 됐다. 안 씨 부모는 아들 일로 가슴앓이하다가 결국 갈라섰다. 그 타격은 안 씨의 동생들을 그대로 강타했다. 유독 안 씨를 잘 따랐던 막내 남동생은 형의 죽음으로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얻었다. 환각과 환청을 보고 들을 정도로 증상이 심각하다. 지금까지도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안 씨 여동생은 남동생 치유를 위해서라도 오빠 명예를 되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 씨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입대 전엔 전라도 광주 시내 불고깃집 주방에서 1년 동안 칼을 잡았다. 쉬는 날엔 집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동생에게 솜씨를 발휘했다. 듬직한 오빠이자 형이었다. 175cm에 78kg이었던 안 씨는 겉보기에도 든든했다.
안 씨는 1997년 육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때가 스물한 살이었다. 이듬해 1월 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양구 한 부대에 배치받았다. A 복지회관 조리병 보직을 받은 안 씨는 만족했다. 고되고 소모적인 군 생활 속에서도 요리 실력을 갈고닦으며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순탄한 부대 생활이 이어졌다. 안 씨는 군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선임에게 위로를 건넬 정도로 부대 동료들을 잘 챙겼다. 선임 이 아무개 일병은 안 씨를 “조용한 편이나 성격이 터프한 부분이 있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줄 아는 남자다운 친구”로 기억했다.
어느새 안 씨의 왼쪽 가슴에 계급장 작대기가 두 장 쌓였다. 내무반 생활에 익숙해질 일병 말 호봉이었다. 한 장 더 올라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98년 9월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갑작스레 타 부대 전출 명령이 떨어진 것. 새로 문을 연 B 복지회관이었다.
복지회관 취사장(병영식당). 조리병은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날에도 취사장 청소 등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사진=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제공
청천벽력과 같았다. 겨우 자리 잡았는데 새로 시작해야 했다. 덜컥 불안감이 덮쳤다. 특히 간부 관리가 소홀한 영외 부대인 복지회관 특성상 선임을 잘못 만나면 큰일이었다. 안 씨는 전출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일주일 만에 짐을 쌌다.
B 복지회관은 C 복지회관, D 복지회관 등 타 부대에서 차출된 인원으로 채워졌다. 서로 ‘아저씨’라 부르기도 하고 어색한 선후임이 되기도 했다. 새로 개관한 탓에 B 복지회관은 바쁘게 돌아갔다. 점심엔 민간인 상대로 밥을 팔았고, 저녁엔 군 간부 회식을 받아냈다.
쉴 틈이 없었다. 하루 14시간 일할 때도 있었다. 일주일 평균 24시간 초과 근무했다고 추정된다. 일주일에 목요일 하루만 쉬었다. 휴일에도 마음껏 쉴 수 없었다. 조리병은 쉬는 날에도 부대원 식사를 챙겨야 했다. 서빙병, 카운터병 등과 비교해 더 고됐다. 불침번 근무나 청소 같은 잔업도 빼먹을 수 없었다.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안 씨 불안감은 현실로 닥쳤다. 최고선임 조 병장은 안 씨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안 씨가 부대 재배치를 받자마자 마음 정리를 위해 휴가를 다녀온 게 화근이었다. 조 병장 괴롭힘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밤이 되면 조 병장은 ‘부대의 왕’이었다. 관리관인 간부가 퇴근하면 영외 복지회관을 감독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부대원들에 따르면 조 병장은 안 씨에 은근한 압박을 가했다.
참다못한 안 씨는 관리관인 서 아무개 상사를 찾았다. A 복지회관으로 다시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리관에게 가혹행위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고자질’에 어떤 보복이 따를지 몰랐다. 육체적 과로와 정신적 고통이 겹쳤다. 안 씨에게 남은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건 초기 안 씨 외삼촌은 타살을 주장했다. 자신의 목을 여섯 차례나 찌를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위원회는 법의학 전문가에 의뢰한 결과 타살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목 부근 6개 자상은 같은 방향으로 수평 배열돼 있었고 방어흔은 보이지 않았다. 치명상은 경동맥을 찢은 3번과 6번 자상이었다. 나머지 1번, 2번, 4번, 5번 자상은 스스로 찌르면서 주저할 때 생기는 주저흔으로 분석됐다.
안 씨 사건을 담당한 박하연 조사관은 “관리관이 퇴근했을 때 실제 부대를 관리했던 선임과 불화는 안 씨에게 상상 이상의 압박감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청춘들의 하루 14시간 중노동으로 복지회관이 운영됐다. 영외 복지회관의 폐해”라며 “억울한 죽음으로 명예가 실추된 망인과 유가족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조사를 이어가겠다”고 덧붙였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