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때 불온서적 단속 영장 나홀로 기각 등 특유의 강단으로 5선…갈등 빚은 문 정부서 장관 지명돼
신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다리는 취재진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추미해 후보자는 1958년 대구의 세탁소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세탁소에 도둑이 들어 세탁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손님들에게 옷값을 배상해준 뒤 추 후보자 가족은 빈털터리가 됐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는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경북 명문인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법학과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또 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5년 춘천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이후 인천지방법원, 전주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직을 역임했다.
판사 시절 추 후보자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의 민중 탄압과 공안통치가 극에 달할 때였다. 검찰은 불온서적을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의 서점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서점을 이 잡듯 뒤져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사회 부조리를 다룬 서적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문제도서 명단에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포함됐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지만 당시에는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혔다. 산업화의 희생양이 된 철거민 이야기를 읽으면 빨갱이로 몰리는 셈이었다.
검찰은 전국 법원에 동시다발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에서도 일제히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춘천지방법원에서만 유일하게 대형 서점에 대한 영장이 기각됐다. 2년차 막내 판사였던 추 후보자가 영장을 기각시킨 것. 검찰이 청구한 영장에는 서점을 압수수색하는 명목이 경범죄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로 적시됐다. 영장에는 설명도 없이 책 100권의 목록만 나열되어 있었다. 당시 판사 추미애는 어떠한 법적 정당성이나 논리적 근거나 상식이 없는 영장이라고 판단했다.
1995년 광주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추 후보자는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김대중 총재를 사적으로 처음 만나게 된 추 후보자는 판사 신분으로 유력 정치인을 만나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사직서를 쓴 후 자리에 나갔다. 추 후보자는 판사복을 벗고 정계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너는 이제 이 집 문턱을 넘지 마라.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라며 딸에게 의절을 선언했다.
아버지의 의절 선언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번은 추 후보자가 결혼을 하겠다며 서성환 변호사를 소개했을 때다. 서 변호사는 추 후보자와 대학 동기다. 아버지는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서 변호사와 결혼을 탐탁잖아했다. 영남에서 호남 사위를 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서 변호사의 장애로 결혼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양가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에 성공했다.
추미애 당시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2004년 4월 광주에서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며 삼보일배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계에 입문해서도 추 후보자의 소신과 강단은 빛을 발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 출마해 광진구 을 지역구에서 초선 배지를 달았다.
“존경하는 대구시민 여러분! 이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지긋지긋한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 유세단장이던 추 후보자의 호소다. 지역감정이 극렬하던 시절 대구에서는 야당이 선거 유세만 해도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당시 유세단 이름이던 ‘잔다르크 유세단’에 추 단장의 성을 합쳐 추 후보자는 ‘추다르크’란 별명을 얻었다.
추 후보자의 정치 인생에도 굴곡은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기 지도자로 점찍었던 추 후보자는 2004년 탄핵 정국에서 선봉에 섰다.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그는 탄핵 반대파 최후의 2인이었으나 당의 강한 압력에 굴복했다. 탄핵 찬성표를 던진 것. 탄핵이 부결되고는 민주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탄핵 여파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추 후보자는 광주에서 3보 1배까지 했다. 그럼에도 17대 총선에서 의석을 다 뺏기고 9석만 확보해 소규모 정당으로 추락했다. 그는 “탄핵 때 찬성표를 던진 건 정치 인생 중 가장 큰 실수”라고 얘기한 바 있다.
추미애 후보자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로 복귀했다.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에 당선, 18대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 국민통합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5선 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문재인 정부 초반 추 후보자는 청와대, 친문 진영과 갈등을 빚었다. 인사 문제로 마찰이 있어 당청 관계가 불안했다. 이 때문에 입각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이번 인사는 문 대통령이 추 후보자의 ‘강단’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