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이낙연 승부수 던질지 시선집중…한국당 황교안 출격 안할 땐 ‘김병준 카드’ 꺼낼 듯
20대 총선에 출마했던 안대희 전 대법관의 유세 장면. 사진=박은숙 기자
“잘하면 제2의 노무현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잘 안 되면 안대희 꼴이지….”
정치권 한 관계자는 정치권에 거세게 불고 있는 험지 출마론을 이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결과는 극과 극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98년 제13대 총선 때 부산 동구에 출마, 51.0%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후 14대 총선과 1995년 첫 민선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연달아 낙선했다.
심기일전한 노 전 대통령은 1998년 종로 보궐선거에서 부활, 대권직행 열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도전장을 냈다. 결과는 35.7% 득표율로 낙선. ‘바보 노무현’ 열풍이 분 것도 이때부터다. ‘노풍(노무현 바람)’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16대 대선에서 48.9%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반면 20대 총선 당시 보수 텃밭인 부산 출마를 준비하던 안대희 전 대법관은 새누리당 대표였던 김무성 한국당 의원의 공개적인 압박으로 서울 마포을로 방향을 틀었지만, 끝내 미끄러졌다. 비문(비문재인)계인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51.9%)이 예상 밖으로 선전하면서 33.2%에 그친 안 전 대법관을 제쳤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노웅래 의원의 경우 당내 공천도 불투명했지만, 지역구 관리를 잘한 덕분에 본선에서 승리한 케이스”라며 “PK(부산·울산·경남) 준비를 한 안 전 대법관이 명분 없이 수도권에 출마한 것도 패배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당 지도부에 등 떠밀려 나가는 것은 자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험지 출마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은 ‘장렬 전사론’이다. 불명예스럽게 국회의원직을 한 번 더 하느니, 적진에 명예롭게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하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얘기다.
험지 중 가장 주목받는 곳은 21대 총선 최대 격전지인 서울 종로다.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가 현재 안방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당에 딱히 유리한 지역은 아니다. 문민정부 이후 치러진 14대 총선에선 이종찬 전 민주자유당 의원이, 제15대 총선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16대 총선에선 정인봉 전 한나라당 의원이, 17∼18대 총선에선 박진 전 한나라당 의원이, 19∼20대 총선에선 정세균 후보자가 각각 당선됐다.
이 기간 총 2차례(1998년과 2002년) 보궐선거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박진 전 의원이 당선됐다. 문민정부 이후 총 9차례(보궐선거 포함) 선거의 스코어는 ‘3(현재 여당) 대 6(현재 야당)’이다. 각 당 대선주자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보수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직전 총선 때 당 지도부의 험지 출마 요구를 받고 종로에 도전장을 냈지만, 39.7%에 그치면서 정 후보자(52.6%)에게 참패했다.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가 12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참석했다. 사진=박은숙 기자
당시 정세균 캠프에서 뛰었던 측근은 “인물 경쟁력만큼 중요한 것은 출마 명분인데 이것이 종로 선거의 핵심”이라며 “오 전 시장이 정치 1번지의 자부심을 가진 종로 유권자들을 파고들지 못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 종로에서 패한 오 전 시장은 21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당의 ‘자객 공천 1호’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법무부 장관에 추미애 카드를 쓴 민주당은 다시 ‘오세훈’을 잡기 위한 전략 공천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종로가 무주공산이 되면서 민주당도 한국당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들이 꼽은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낙연 총리의 출격이다. ‘정세균·이낙연’의 배턴 패스는 정 후보자가 후임 총리로 거론됐을 때부터 여권 내부에서 거론되던 총선 시나리오다. 종로 출마가 호남에서 내리 4선(16·19대)을 한 이 총리의 탈호남을 위한 최상의 전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총리도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인 부촌이 많은 지역 특성도 이낙연 카드에 힘을 싣는다. 이 총리는 여의도의 대표적인 중도 온건파로 꼽힌다.
다만 자기 세력이 없는 이 총리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한 번의 실패가 정치적 퇴장을 의미해서다. 정 후보자는 최근 두 번의 총선에서 내리 재선에 성공했다. 이 총리가 종로 수성에 실패한다면, 차기 대권의 선택지는 아예 없어진다. 2008년 민주당을 이끌었던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18대 총선 당시 종로에서 패한 뒤 한동안 강원도 춘천으로 정치적 유배를 떠났다.
당내 일각에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임종석 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종로 출마설도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다만 총선 불출마 뜻을 접더라도 명분 없는 종로보다는 원 지역구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민주당 쪽에 소위 움직이는 핵심 세력들은 어떤 경우에도 종로를 뺏길 수 없으니 이 총리가 (종로에) 가야 한다는 얘기, 임 전 실장은 본래의 자기 선거구인 중구성동으로 갈 것이라는 얘기를 해왔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문재인 정부 1기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 핵심인 ‘이낙연·임종석’ 카드를 전진 배치하는 안을 오랜 기간 구상했다는 의미다.
앞서 민주당의 험지 출마는 지난 10월부터 본격화됐다. 민주당은 10월 10일 국회에서 경북도당과 예산정책간담회를 개최, ‘구미형 일자리’를 비롯한 소재·부품 산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공개한 내년도 289개의 생활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서 경북은 경기(1757억 원·44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946억 원(30건)의 예산을 확보했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TK(대구·경북) 패싱은 없다는 시그널”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한 달 뒤인 11월 13일 김용진 전 기획재정부 제2차관(경기 이천), 김학민 전 순천향대 산학협력부총장(충남 홍성·예산), 황인성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경남 사천·남해·하동) 등 험지 출마자를 영입했다.
한국당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내부에선 대선주자급인 중진 전·현직 의원에 대한 험지 출마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당 수장인 황교안 대표를 비롯해 홍준표 전 대표, 김태호 전 의원, 김병준 전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대상이다. 김태흠 의원은 11월 5일 아예 ‘영남권·서울 강남 3구의 3선 이상 의원’을 수도권 험지 출마자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다. 험지 출마를 요구받는 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황 대표는 지난 5월 종로 출마 요구에 대해 “당이 필요하다면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라도 지는 것이 맞다”고 했으나, 이후로는 관련 질문에 확답을 피하고 있다.
홍 전 대표는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고향인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출마를 검토하는 홍 전 대표는 11월 13일 대구에서 험지 출마 질문을 받고 영화 ‘친구’의 대사인 “니(네)가 가라 하와이”를 언급하며 거부감을 보였다. 당 공천기획단이 중진들의 험지 출마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12월 17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 입당 이래 24년간 글래디에이터(검투사) 노릇만 해 왔다”며 재차 거부했다. 그는 이틀 뒤에도 “물갈이는 탄핵 정국에서 책임져야 할 사람들끼리 논쟁하고, 나를 끼워 그 문제를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힐난했다.
보수진영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김태호 전 의원은 경남 산청·함양·거창·합천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당 내부에선 50대인 김 전 의원이 수도권에 출마, 중도 외연 확장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민주당 일각에서도 안도하는 기류가 엿보인다. 친문(친문재인)계 한 관계자는 “경남도지사를 지낸 김 전 의원은 진보진영에서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인물”이라며 “수도권이 아닌 PK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길을 택한 것은 진보진영에 득”이라고 말했다.
TK 출마를 고심하던 김병준 전 비대위원장은 결국 당의 험지 출마를 받아들였다. 한때 ‘TK 출마 준비→당의 선 전략·제안’을 요구하던 김 전 위원장은 12월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지역 험지 출마 등 당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김 전 위원장의 험지 출마는 황 대표와 사전교감을 통해 나왔다. 이에 따라 황 대표가 종로에 출마하지 않을 경우 김 전 위원장이 출격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위원장은 현재 종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문의 이낙연 vs 원조 친노 김병준’ 간의 대결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