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전선(사진)이 (주)진로의 담보부 채권을 대량 확보함에 따라 골드만삭스 주도로 진행되던 진로 처리문제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혼미 속으로 빠졌다. 작은 사진은 ‘자력갱생’을 외치는 진로 노조원들. | ||
애초 진로의 법정관리를 주도했던 골드만삭스의 입김이 시간이 지날수록 축소되고 있다는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 이런 가운데 (주)진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뜬금없이 대한전선이 등장해 주목된다. 대한전선은 진로의 채권 2천3백90억원어치를 확보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대한전선이 등장하자 그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진로 노조도 ‘진로 살리기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웹사이트를 여는 등 진로 처리를 둘러싼 새로운 변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대한전선의 등장은 예기치 못한 돌출변수. 진로 안팎에선 (주)진로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개시된 채권 신고에서 그동안 얼굴이 없던 숨은 채권자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은 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전선업체인 대한전선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대한전선의 경우 이 회사가 상장기업이기 때문에 오는 8월27일 채권단 회의를 앞두고 조금 일찍 채권주의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대한전선의 등장으로 진로의 처리방향을 놓고 골드만삭스, 기존 진로 경영층의 정상화 방안에 동의한 국내 채권단, 장진호 전 회장과 주식반환소송을 벌이고 있는 임춘원 전 의원, 자력갱생을 내세우고 있는 진로 노조 등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대한전선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채권 매입 내역.
대한전선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난 6월11일 (주)진로의 부동산과 진로종합유통의 부동산을 담보로 판매한 채권 7백93억원어치(액면가 기준)를 할인된 가격인 6백40억원에 사들였다. 이어 지난 7월11일 진로 소유 부동산을 담보로 판매한 채권 1천8백50억원어치(액면가)도 1천7백50억원에 사들였다.
이 채권은 하나은행에 신탁된 것으로 경기도 이천과 충북 청원에 있는 소주공장이 채권의 담보물건. 만약 진로가 청산되거나 매각되면 이 공장에 대한 부분은 대한전선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 같은 형태(부동산 등 자산을 담보로 발행한 채권)로 발행된 진로의 채권은 모두 3천5백억원으로 알려졌다. 결국 대한전선은 (주)진로가 발행한 담보부 채권 총액 가운데 3분의 2가량을 보유하고 있는 셈.
(주)진로의 최대 채권자인 골드만삭스의 경우 채권 규모는 총 3천억원에 이르지만, 담보부 채권은 6백억원에 불과하다. 담보부 채권의 확보가 중요한 이유는 진로의 정리계획을 확정하는 데 담보부 채권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장진호 전 진로 회장 | ||
대한전선은 최근 몇 년간 채권투자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하지만 진로에 대한 투자는 우선 규모 자체가 2천4백억원대에 이르고 있어 단순 투자라고 보기에는 석연찮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해석.
대한전선은 지난해 5월에도 1천4백73억원을 들여 무주리조트의 지분 75%를 인수하는 등 지난해와 올해 대규모의 자금이 기업인수나 채권 매입에 들어간 상태다. 물론 대한전선의 부채비율은 140%대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의 채권을 공격적으로 사들인 데 대해 단순한 투자목적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게다가 진로의 명운과 관련된 담보부 채권만 사들인 것도 단순 투자목적이라기보다는 진로의 향방과 관련된 발언권 행사와 관련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선 대한전선의 진로 채권 집중 매입이 진로의 기존 경영진인 장진호 전 회장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시각도 대두되고 있다. 진로의 전격적인 법정관리 결정은 골드만삭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고, 골드만삭스를 견제하고 장 전 회장을 구해주는 흑기사 역할을 대한전선이 맡은 게 아니냐는 시각.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 진로의 운명은 대한전선의 동의 없이는 결정될 수 없게 된 부분이다. 지금까지는 (주)진로의 법정관리나 매각작업을 골드만삭스가 주도했지만, 대한전선의 동의가 없다면 골드만삭스도 어쩌지 못하게 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대한전선의 움직임과 함께 진로 노조의 움직임도 관심을 끌고 있다. 진로 노조는 지난 7월 말 ‘진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웹 사이트를 만들고 진로 노조 위주로 벌이던 ‘안티 골드만삭스 운동’을 ‘진로 살리기 국민운동’으로 전환시켰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운동본부에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해 여론을 진로의 자력갱생쪽으로 모아 나간다는 것. 물론 노조원을 포함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8백억원을 모집해 국민주식을 사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내·외자를 유치해 화의채무를 일시에 갚아 경영을 정상화시키겠다는 것.
이들은 기존 대주주의 주식 전량 소각을 선언문에 명시해 장진호 전 회장 등 기존 주주가 참여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식시키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진로의 경영권 향방은 주식수와는 상관이 없다.
진로측도 “장외시장에서 거래되는 진로의 주식은 수십억원이면 몽땅 살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휴지가 돼 있다. 문제는 채권. 채권 확보 규모에 따라 진로의 처리 방향에 대한 주도권을 누가 행사하게 되느냐가 결정되는 미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진로 노조를 중심으로 한 진로 살리기 운동이 본격적인 여론몰이 작업에 나섰고, 진로 매각을 주장하던 골드만삭스의 움직임은 예기치 않던 대한전선의 등장으로 제동이 걸렸다. 여기에 임춘원 전 의원은 장 전 회장에게 주식 반환 청구소송을 하는 동시에 채권단에 진로 매각의 우선협상권을 요구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것.
이에 대해 재계에선 그만큼 진로가 매력적인 기업이라는 반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치열한 두뇌 싸움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진로 처리 문제가 어떤 식으로 매듭지어지고,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