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 승무원 만취 정황 없어 ‘심신미약’ 주장 의문…전문가 “계획범죄 가능성도”
2019년 12월 14일 서울시 강서구 송정동 한 오피스텔에서 현직 경찰관 A 씨(32)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관련기사 “어깨동무 하고 들어갔는데…” 현직 경찰관 피살 사건 입체 추적). A 씨가 사망한 장소는 다름 아닌 11년 지기 친구 김 씨의 집. 경찰은 주변 CCTV를 확인해 최초 신고자인 김 씨를 피의자로 특정하고 긴급체포했다. 한편 김 씨는 현직 항공사 승무원으로 사망한 A 씨의 결혼식 사회를 봐줄 정도로 피해자와는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김 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피해자, 사망 몇 시간 전 아내와 여행 날짜 정해
A 씨의 유가족은 분통을 터뜨렸다. 김 씨의 범행은 결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으며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가족의 증언을 종합하면 두 사람은 2019년 12월 13일 오후 저녁을 먹기 위해 만났다. 식사자리를 먼저 제안한 쪽은 피의자 김 씨였다. A 씨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으니 그 보답으로 밥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유가족에 따르면 A 씨는 김 씨와의 약속을 아내에게 미리 알렸으며 식사자리에서도 틈틈이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사건이 벌어진 김 씨의 오피스텔. 사진=황채영 인턴기자
사건 당일 김 씨가 만취할 만큼의 술을 마셨는지도 의문점으로 남았다. 앞서 두 사람은 식당에서 소주 2병과 맥주 1병을 마신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적으로 건장한 성인 남성 2명이 만취할 만큼의 양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오피스텔 인근 CCTV에도 두 사람이 심하게 비틀거리거나 취한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다. A 씨 역시 14일 오전 1시까지 아내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A 씨의 아내는 “오전 1시까지 연락했다. 친정이랑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언제 갈지 묻는 게 마지막 연락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가 직접 A 씨의 아내에게 외박에 대한 동의를 구한 정황도 있었다. 유가족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김 씨는 A 씨의 아내와 통화하면서 “제수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같은 서비스인으로서 힘든 점 다 이해합니다. 오늘 A와 술 한잔할 건데 우리 집에서 재우고 가도 될까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 집 비밀번호 정확히 눌러
현재 김 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면서도 “A 씨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심신미약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가족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일 김 씨가 보인 여러 가지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김 씨는 범행 직후 속옷 차림으로 옆 동 여자친구의 오피스텔로 도망쳤는데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오류 없이 정확하게 누르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피가 묻은 속옷을 벗어두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런데 김 씨와 그의 여자친구는 교제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A 씨 지인은 “김 씨와 여자친구가 사귄 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이에 서로의 집을 가면 얼마나 많이 가봤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씨가 주장하는 대로 사건이 벌어질 당시 만취했다면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친구의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정확하게 누르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배상훈 프로파일러 역시 앞서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보통 승무원은 일반인에 비해 심리적으로 안정된 사람을 고용하는데 30분 만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음주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A 씨의 집으로 걸어올 당시 만취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점, 경찰관인 피해자와 김 씨가 비슷한 수준으로 취해있던 것으로 보아 계획 범죄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김 씨가 평소 안정적인 가정을 부러워했다는 점에 미루어 A 씨에 대한 질투심이 술김에 더욱 심해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편 온라인에서는 김 씨가 과거 폭력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는 풍문도 돌고 있다. 자신을 김 씨의 동창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은 “김 씨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 부장도 맡았었다. 싹싹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A 씨의 유가족은 사건 이후, 김 씨의 가족이 김 씨와의 면회를 끝내고 웃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도 했다. A 씨 아내는 “김 씨의 가족은 우리가 멀리서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경찰서 안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날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그날 김 씨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며 “김 씨가 죄를 뉘우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좋겠다. 죗값을 치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