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41] 갈등의 시대에 화합의 지혜 일깨워주는 줄의 미학
얼굴을 들어도 밝은 달은 눈에 안 들어오네
…당사자는 마치 생사를 결판 짓는 듯하니
구경꾼들 미처 승부를 논할 겨를 없네
홀연히 산이 무너지듯 웃음소리 터지면
줄과 깃발 늘어뜨린 채 패잔병을 끌고 가네
과연 무엇을 묘사한 장면일까. 이 글은 조선 후기 유학자 황현의 시문집인 ‘매천집’에 수록된 ‘줄다리기’란 시의 일부분이다. 아마도 이 시를 읽으면서 학창 시절 운동회에서 하던 줄다리기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전통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는 운동회의 약식 줄다리기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의 전통 줄다리기는 2015년 ‘줄다리기 의례와 놀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과 함께 4개국 공동 등재). 과연 줄다리기의 어떤 가치가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받게 한 것일까.
줄다리기 문화의 본질은 ‘대결’이 아니라 ‘화합’이다. 당진 기지시 줄다리기가 끝난 뒤 풍요와 평안의 의미로 줄을 잘라가는 사람들. 사진=연합뉴스
줄다리기는 벼농사 문화권에서 풍농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행해지는 대표적인 전통문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줄다리기는 주로 중부 이남 지역에서 많이 행해졌다. 조선시대 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충주 지방의 줄다리기 풍속이,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충청도 경기도 제주도 등지의 줄다리기 풍속이 소개돼 있다. 이유원이 엮은 ‘임하필기’ 화동옥삼편에서는 줄다리기를 신라와 고려의 옛 풍속이자 명절놀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상 줄다리기는 이미 오래전 농경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줄다리기는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날에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래 지방에서는 단오날에, 제주도에서는 한가위에, 전라도 서해안 지방에서는 2월 초하룻날에 줄다리기 놀이를 펼치기도 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른 우리나라 전통 줄다리기에는 총 6건의 국가지정문화재(2건) 및 시도지정무형문화재(4건)가 포함돼 있다. 영산줄다리기(국가지정 제26호)와 기지시줄다리기(국가지정 제75호), 삼척기줄다리기(강원지정 제2호), 감내게줄당기기(경기지정 제7호), 의령큰줄땡기기(경남지정 제20호), 남해선구줄끗기(경남지정 제26호)가 바로 그것이다.
수백 명이 참여하는 전통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은 굵고 긴 원줄(몸줄)과 이 원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어진 겻줄(벗줄)로 나뉜다. 당진 기지시 줄다리기. 사진=연합뉴스
수백 명이 참여하는 전통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은 굵고 긴 원줄(몸줄)과 이 원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어진 겻줄(벗줄)로 나뉜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원줄은 지름이 대개 0.5~1.4m에 이를 정도로 굵고 무겁기에 직접 당기기 어렵다. 이 때문에 여러 개의 겻줄을 원줄에 매어 이 줄을 당기며 줄다리기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다른 나라의 줄다리기와 달리 우리 전통 줄다리기는 짧으면 하루, 길면 사흘에 걸쳐 여유롭게 진행됐다. 단순히 승패를 가리는 오락 차원의 놀이가 아니라 풍년을 기원하는 신앙성이 깃든 데다 동질감과 향토애를 키우는 축제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구태여 빨리 승부를 결정지으려 하지 않았기에 한 편의 힘이 달리는 듯하면 상대편에서 일부러 줄을 늦추어 주는 등 서로 조화를 이루는 즐거움을 맛보았던 것이다. 마지막 승부를 겨루는 시간을 빼놓고는 줄을 당기던 사람들이 나와서 쉬기도 하고, 볼일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줄쌈’ ‘줄싸움’ 등으로도 불리지만, 줄다리기 문화의 본질은 ‘대결’이 아니라 ‘화합’이다. 줄로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는 놀이인 셈이다.
줄다리기의 승부가 끝나면 그 줄은 승자의 소유가 되거나 승패와 상관없이 공동의 소유가 되기도 했다.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인 까닭에 이긴 쪽의 줄을 한 움큼씩 잘라 가져가는 풍습도 있었다. 이 줄을 거름에 섞으면 농작물이 잘 여물고, 소를 먹이면 소가 튼튼해지고, 출어할 때 가지고 가면 풍어가 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 줄다리기 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예능보유자들과 참여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역마다 보존회를 중심으로 고유의 민속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탈농촌 도시화’ 경향이 심화되면서, 생활 속의 전통 줄다리기 문화가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특히 요즘 같은 갈등과 대립의 시대에 우리 민족 특유의 대동화합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줄다리기가 다시 뿌리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유네스코한국위원회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