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겸심·김경수 사건 맡은 부장판사들 ‘잠정’ 판단 공개…“신뢰 저하, 후임에 부담” 내부 비판 거세
한 서울고등법원 판사는 “판결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재판정에서 미리 자신의 판단을 언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법원의 신뢰를 갉아먹는 일인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라며 “법원이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판결을 선고하기 전까지 판사는 어떤 식의 ‘유무죄 뉘앙스’도 공개하지 않는 게 당연하게 여겨져 왔지만 최근 주요 사건을 맡은 판사들이 예단을 밝히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사진=영화 ‘배심원들’ 홍보 스틸 컷
#“투자 아니라 대여로 봐야 한다” 발언 논란
“원금이 보장되고 수익이 나오면 대여로 보는 게 원칙이다.” 2월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송인권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네 번째 공판 때 재판장인 송인권 부장판사가 한 발언이다.
송 부장판사는 2월 24일자 인사 대상자에 포함돼 서울남부지법으로 옮기는 것이 확정된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대놓고 밝혔다. 그는 “민사 재판에서 투자냐 대여냐를 다툴 때 원금이 보장되고 수익을 지급했다면 일반적으로 대여로 보는 게 원칙”이라며 “그렇지 않다면 검찰은 이를 뒤집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정경심 교수 측의 손을 들어주는 멘트이기도 했다. 검찰은 ‘정 교수가 코링크PE에 10억 원을 투자하고 조 아무개 씨와 허위 컨설팅계약을 맺기로 해 총 1억 5000만여 원의 회사 돈을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 교수 측은 10%의 이자수익을 받기로 하고 돈을 빌려준 것이지 횡령이 아니며, 허위 컨설팅 계약 등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맞서고 있었다. 인사 조치로 선고를 하지 않는 ‘재판장’이 재판 과정에서 미리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을 두고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송 부장판사는 정경심 교수 측 변호인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이 사건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사건의 쟁점이 아니다”며 검찰 측에 관련 언급 자제를 지휘할 것을 요청하자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언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답해 방청석에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송인권 부장판사는 이미 검찰 측 기소 및 공소장에 대해 여러 차례 부딪히며 ‘논란’이 된 바 있다. 특히 2019년 12월에는 검찰이 동양대 표창장 위조사건 관련, 범행 날짜를 수정하는 내용이 담긴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자 “동일성이 없다”고 불허하기도 했다. 당시 송인권 부장판사는 “죄명과 적용법조, 표창장 문안 내용은 동일성이 인정되지만 이 사건 공범과 범행일시, 장소, 범행방법, 행사목적 모두 동일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공소장 변경을 불허했다. 이에 검찰은 “재판 진행이 편파적”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검찰이 추가로 공소하며 한 범죄 행위에 대해 두 건의 기소가 존재하는 기형적인 재판이 진행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송 부장판사는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당하기까지 했다.
#인사를 앞두고 “김경수가 봤다” 잠정결론 내리기까지
인사로 떠날 것이 예상된 부장판사의 ‘예단’ 공개는 이뿐 아니다. 서울고법 형사2부(차문호 부장판사)는 김경수 경남도지사 사건 항소심에서 선고 일자를 미루면서, 정작 잠정 판단을 공개했다.
차문호 부장판사는 1월 21일 재개된 김 지사 항소심 공판에서 “그동안 재판에서 쌍방이 주장하고 심리한 내용은 2016년 11월 9일 드루킹이 피고인에게 ‘온라인 정보보고’를 하고, 댓글조작 프로그램 ‘킹크랩’을 시연했는지 여부”라며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각종 증거를 종합한 결과 피고인의 주장과 달리 드루킹에게 킹크랩 시연을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 부분 증명했다고 판단했다”고 언급했다. 당초 1월 21일 선고 공판을 열 계획이었지만, 갑작스레 이를 취소하고 변론 재개를 결정하면서 ‘잠정’ 판단을 내놓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게다가 선고가 이미 두 번이나 연기된 터라 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높았다.
서울법원종합청사 전경. 한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인사 이동 될 사람이 ‘판단’을 공개하면 후임 판사에게 너무 부담이 된다”고 비판했다. 사진=고성준 기자
차 부장판사 역시 이미 인사가 예정됐던 터라, 뒷말이 나오고 있다. 이번 인사에서 서울고법 형사2부는 재판장이 차문호 부장판사와 최항석 배석 부장판사 등 2명이 재판부를 떠나고 법원 내 진보 단체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자 사건 주심인 김민기 부장판사(26기)만 남게 됐다. 선고가 2차례 연기된 것을 놓고도 재판부 내에서 유무죄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추측이 제기됐는데, 차 부장판사가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일부러 후임 재판부에 부담을 주려 한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한 판사는 “인사를 앞두고 있으면 절대 사건 처리 방향을 언급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후임 재판부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진다”며 “사건 관련 기록을 정리한 뒤 그 위에 메모로 간단히 판단만 전달하고, 대신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게 관례였는데 이런 것이 무너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 역시 “재판부 내에서 서로 이견이 생기면 합의를 하거나, 거수를 했을 때 2 대 1이 되라고 3명으로 재판부를 꾸리는 것인데 그 안에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인사를 갈 사람이 그렇게 공식적으로 ‘판단’을 공개하면 후임 판사에게 너무 부담이 된다”며 “판사들마다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1심부터 3심까지 받는 것인데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 이번 인사 조치로 앞서 언급된 사건들을 맡게 된 판사들은 주변에 “미리 판단을 공개해 버려 부담스럽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