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워진 잣대, 의무 없는 일 판단 관건…‘왜 하필 조국 수사 시점에?’ 의혹 시선도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와 사법부 판사 등 적지 않은 이들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봐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연스레 법조계 평가는 둘로 나뉜다. 올바른 판단이라는 지지가 대다수지만, 일각에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청와대 관련 수사가 진행되는 시점이라 다소 의심스럽다’는 반응으로 말이다.
직권남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내린 결정이라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은 물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도 적용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 농단’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 당시의 대법원 모습.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직권남용이란 무엇인가
직권남용죄는 형법 제7장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죄’ 중 123조에 해당한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함으로써 성립하는 죄다. 행위 주체는 여기서 공무원이어야 하며 국가 기능의 공정한 행사를 방해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단순화하면, 상급 공무원이 하급 공무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을 경우라고 보면 된다. 2010년대 전까지만 해도 자주 등장하지 않던 처벌 조항이다.
그동안 검찰과 법원 모두에서 ‘직권을 남용한다’는 부분과 ‘의무 없는 일’의 기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어디까지가 의무 없는 일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 법조계에서는 직권남용죄의 기본 성립 조건인 ‘직권남용’과 ‘의무 없는 일’ 등 단어 해석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돼 왔고, 하급심에서도 이에 대해 엇갈린 판단을 내놓기도 했다. 또 정치적인 지시를 이행한, 부하 공무원을 ‘공모 관계’로 봐야 하는지 여부는 검찰 수사팀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을 정도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월 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심리 미진과 법리오해를 이유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리며, 직권남용을 적용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김 전 실장 등이 기소된 것은 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등 소속 직원들로 하여금 각종 정부 지원 사업에 배제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대법원은 이 지시 자체는 직권남용이라고 봤다. 대법원은 “정부 지원금을 신청한 개인 또는 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문예위 등이 수행한 각종 사업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도록 지시한 것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며 직권남용에는 해당한다고 다수 의견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의무 없는 일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라고 판단했다. 즉, 직권남용은 맞지만 임무 수행자의 경우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것’이 의무일 수 있다는 것.
대법원은 “공무원이거나 공공기관 임직원인 경우에는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상하기관과 감독기관, 피감독기관 사이의 지시와 업무 협의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남용으로 보기 어렵다고 가이드라인을 준 것인데, 이로써 직권남용 혐의는 처벌 대상이 ‘상관’으로 집중되고, 처벌 기준도 ‘의무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더욱 명백하게 입증해야만 하게 됐다. 전원합의체에서 내린 결정이라,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은 물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재판도 적용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 간부급 검사는 “최근 잇따른 수사에서 부당한 지시를 내린 공무원 외에, 이를 수행한 공무원 역시 직권남용으로 봐야 하느냐에 대한 내부 논의가 있기도 했다”며 “검찰 내에서는 수행한 공무원도 직권남용의 공범으로 판단했지만 지금 대법원 판단 기준대로라면 ‘지시를 따르는 게 의무’이기 때문에 공범으로 적시해서는 안 되게 됐다. 적용을 더 엄격하게 하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직권남용을 적용할 때에는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검찰 “직권남용 가이드라인은 좋지만…”
앞선 검사처럼, 적지 않은 법조인들은 ‘대법원 취지는 이해한다’는 반응이다. 직권남용이라는 범죄 혐의가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갑자기 기소하기 시작한 ‘새로운 수사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에 참여한 한 검사는 “박근혜 정부 당시 민정수석실 등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정치적인 판단이 과하게 들어간 부분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직권남용이라는 혐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이 엄격해진 첫 판결도 아니다.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직권남용)로 기소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도 최근 원심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을 결정했다.
대법원은 법무부 검찰국장은 검사인사에 대한 일반적인 직무 권한이 없고, 검사인사와 관련한 절차가 법령에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아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안태근 전 국장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서지현 검사에 대한 인사 조치는 확고하게 정해진 ‘원칙과 기준’이 아닌 관행에 반하는 수준이라 직권남용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확실한 원칙과 기준이 없다면 직권남용 처벌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을 법원에 제시한 것이다.
일부 검사들 사이에선 대법원의 판단은 존중하나, 시점이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한 평검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현 정권 관계자들의 직권남용 수사와 재판이 이제 막 궤도에 오르려는 차에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단으로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는 게 맞느냐”고 지적했다. 2019년 청와대를 겨눈 수사를 진행했던 간부급 검사 출신 변호사 역시 “직권남용은 검찰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케이스”라면서도 “그런데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가 났던 사건이 가장 정치적인 고민을 많이 하는 대법원에서 정작 무죄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4월 즈음부터, 1심 판단이 나오게 될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이 가장 이득을 보게 됐다”며 “사문화 됐던 법을 판단하면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이미 유죄가 난 사건들을 지금 뒤집는 것이 과연 얼마나 정치적인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