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시장 대작 위주 재편, 새 활로 모색…실험적 소재 가능한 플랫폼 다변화도 결정적 역할
최근 안방극장에서 단연 화제를 모으는 작품은 배우 엄지원과 성동일, 정지소가 주연한 tvN 드라마 ‘방법’이다. 사진과 한자 이름, 물건을 통해 상대에게 저주를 내리는 능력을 가진 소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초현실적인 세계관이 시청자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고 있다. TV 드라마로는 좀처럼 본 적 없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주인공은 천만 흥행작인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다. 뜻밖에 ‘드라마 작가’로 영역을 넓힌 그는 안방극장에서 오컬트 장르를 개척하면서 시청자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다.
안방으로 무대를 옮긴 영화감독들은 더 있다. 2019년 초 개봉한 ‘내 안의 그놈’으로 영화계에 코미디 열풍을 일으킨 강효진 감독 역시 드라마 연출에 처음 도전한다. 4월 방송을 앞두고 현재 촬영이 한창인 OCN 범죄수사물 ‘번외수사’를 통해서다. 2019년 방송한 ‘타인은 지옥이다’의 이창희 감독, ‘방법’의 연출을 맡은 김용완 감독 역시 그동안 영화 연출자로 활동해온 인물들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다.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은 tvN 월화드라마 ‘방법’을 통해 뜻밖에 ‘드라마 작가’로 영역을 넓히며 안방극장에서 오컬트 장르를 개척해 시청자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연상호 작가. 사진=tvN
최근 안방으로 향하는 감독들은 저마다 스크린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연출자들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영화 연출 기회가 줄어들면서 드라마를 자구책으로 택한다는 일부의 시선은 왜곡된 평가일 뿐이다. 실제로 이들은 드라마에 참여하는 동시에 영화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방법’의 극본을 쓰는 연상호 감독은 2020년 여름 ‘부산행’의 후속편격인 영화 ‘반도’의 개봉을 앞두고 후반작업에 한창이다.
그런데도 ‘방법’을 내놓은 이유는 “쓰고 싶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2월 초 ‘방법’ 제작발표회에서 “영화 작업을 하면서도 드라마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며 “마침 기회가 찾아와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화 작업을 진행 중인 상황이라 무리한 스케줄이었지만 대본을 쓰는 동안 재미있었고 드라마 작가에 소질이 있다는 생각도 했다”고 밝혔다.
이미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이나 ‘반도’, 그리고 ‘염력’ 등 연출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손수 써왔다. 극영화를 내놓기 전 공개한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 등 초기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스토리를 구축하는 작가의 역할을 넘어 작품마다 독창적인 세계관을 설계하는 그는 영화보다 호흡이 긴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실험을 벌이는 셈이다. 이에 힘입어 방송 전 “시청률이 3%를 넘으면 드라마 시즌2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방송 3회 만에 시청률 3.7%를 돌파하자 “시즌2는 물론 영화로도 세계관을 확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런 흐름 속에 영화 ‘미쓰 와이프’, ‘내 안의 그놈’의 강효진 감독도 드라마 연출 데뷔작인 ‘번외수사’를 내놓는다. 유별난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범죄 액션극이다. 배우 차태현이 주연을 맡아 정상훈, 윤경호 등 개성 강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
드라마, 예능 연출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네임 밸류가 높고 흥행 성적도 탁월한 영화감독이라고 해도 드라마에서 전부 성공을 거두는 건 아니다. 2019년 16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작업’의 이병헌 감독은 폭발적인 흥행을 거둔 직후 드라마 작업에 돌입해 2019년 말 JTBC를 통해 드라마 ‘멜로가 체질’를 공개했다. 특유의 맛깔스러운 대사를 통해 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그려 주목받았지만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해 1%의 시청률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화에서 인정받은 고유한 스타일을 그대로 드라마로 옮길 때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넷플릭스 등 플랫폼 확장…새로운 소재·장르의 실험 가능
영화감독들이 안방극장으로 향하는 데는 인터넷동영상서비스 OTT(Over The Top·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대표되는 플랫폼의 확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콘텐츠 제작에 공격적인 넷플릭스가 그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독창적인 세계를 가진 영화감독들을 적극 기용해 드라마 연출을 맡겼다.
2019년 방송한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이 대표적이다. 영화 ‘끝까지 간다’와 ‘터널’로 흥행에 성공한 김성훈 감독이 연출하고 류승룡 주지훈 배두나가 주연한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와 좀비를 접목해 성공을 거뒀고, 오는 3월 13일 시즌2를 공개한다.
넷플릭스는 독창적인 세계를 가진 영화감독들을 적극 기용해 드라마 연출을 맡겼는데 2019년 방송한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이 대표적이다.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배우 류승룡, 배두나, 주지훈, 그리고 김은희 작가와 김성훈 PD. 사진=박정훈 기자
넷플릭스는 현재 영화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과 손잡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 제작에 착수했고, 영화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과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제작해 공개를 앞두고 있다. 한 드라마 제작사의 대표는 “넷플릭스가 거대 자본과 전 세계를 아우르는 플랫폼 영향력을 앞세워 영화감독들을 드라마로 이끌면서 그 후속 효과가 국내 안방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단일 드라마로 끝나지 않고 시즌제로 확대하거나 영화 같은 추가 콘텐츠로 확장하는 방식까지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영화감독의 드라마 진출이 잦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OCN이 시도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중간 형태인 ‘드라마틱 시네마’ 프로젝트 역시 이를 표방한다. 2019년 이서진이 주연한 드라마 ‘트랩’은 영화 ‘백야행’을 연출한 박신우 감독이 연출해 드라마와 영화의 경계를 오가는 장르로 완성됐다. 뒤 이어 방송한 ‘타인은 지옥이다’와 방송을 앞둔 ‘번외수사’ 역시 맥을 같이 한다.
지상파보다 케이블위성채널에 영화감독들의 진출이 집중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도 있다. 방송 관계자들은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공통적으로 지목한다. 표현 방식에 대해 비교적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지상파와 달리 케이블채널은 장르는 물론 소재나 그 표현 및 묘사에서도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방법’의 경우 잔혹한 묘사 등 오컬트 장르 특유의 잔인한 장면도 자주 등장하지만 오히려 그런 면에서 마니아 시청자의 열띤 반응을 얻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의견도 있다. 영화시장이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주도하는 대작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작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는 움직임이 이런 흐름을 가속화한다는 분석이다. 한 영화사 관계자는 “한국영화 편수는 늘지만 정작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해 평가받는 영화는 점차 줄어드는 분위기 속에 영화감독들이 다양한 시도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무대로 드라마에 눈을 돌린다”는 해석을 내놨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