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 사망 이후 재계에선 현대그룹의 새 사령탑이 누가 될 것이냐를 두고 여러 추측이 오갔다.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등이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고 정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새 사령탑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특히 지난 8월 중순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을 외국인이 집중 매입하자 KCC그룹, 현대백화점 등 범현대가 기업들이 나서 연합방어에 나서 모종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현대그룹의 새 사령탑과 관련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사람은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막내 남동생이자, 정몽헌 회장의 삼촌인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KCC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지난 8월 중순 외국인들이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매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장내에서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대거 매집, 정몽헌 회장 사후 표류하고 있던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 방어를 거들고 나섰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확보에 대해 “(정몽헌 회장의) 유족들의 경영참여 준비가 매듭될 때까지 현대그룹을 섭정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행보가 ‘대북사업으로 몰락위기에 처한 현대그룹의 지원에 앞장선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KCC그룹에 대한 시장평가가 부정적으로 나오자 한발 물러선 상태.
▲ 정상영 KCC 명예회장 | ||
KCC그룹은 “정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을 섭정’한다는 얘기는 와전된 것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룩한 현대그룹을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 방어에 나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가에 다른 어른들도 있는데 현대그룹의 앞날을 나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며 나이 많은 조카(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도 있는 만큼 현대그룹의 앞날은 가족들과 협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다. 조카손주(정몽헌 회장의 아들을 지칭)가 아직 나이가 어려 직접 경영에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집안 어른의 한 사람으로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잘 지켜 조카손주에게 안정적으로 넘겨주고 싶다”고 말했다.
집안 어른이라는 입장에서 시작된 정상영 명예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매입 결정은 예상치 못했던 다른 문제도 낳았다. 현행 공정거래법의 ‘계열편입 규정’에 적용될 가능성이 큰 것.
실제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지분보유나 경영에 간여할 경우 같은 계열로 묶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상 같은 계열로 편입되려면 원칙적으로 상장사의 경우 3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야 하지만 지분율이 이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최대주주이거나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경우 계열편입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집안 어른의 자격으로 조카를 돕기 위해 나섰던 정상영 명예회장의 생각은 자칫 현대그룹의 폭탄을 떠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진퇴양난에 처하고 만 셈이다.
KCC그룹의 현대그룹 지원이 공정거래법에 의해 제동이 걸리자 현대엘리베이터의 1대주주인 김문희씨(고 정몽헌 회장의 장모)가 실제 그룹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 고 정몽헌 회장이 영면한 지난 8월8일 부인 현 정은씨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하남 검단산 선영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최근 현 씨가 경영수업에 들어가 재계의 눈길을 끌고 있 다. | ||
어쨌든 김씨는 정 명예회장의 ‘도움’에 대해 “유족들이 경황이 없으니까 측면에서 돌봐주겠다는 의미로 여겨지며 고맙게 생각한다”고 부연설명해 나름대로 향후 독자행보를 할 수 있음도 시사했다. 그는 “당장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경영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다”며 경영권 방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이 정 명예회장에게 담보로 잡혀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즉 대주주 지분권을 행사하는 데 어떤 장애도 없다는 것.
눈길을 끄는 것은 김씨가 정 명예회장의 도움을 ‘측면에서 돌봐준다’라고 표현한 점. 범현대가의 지원은 ‘지원’ 수준에 그칠 뿐, 자신은 독자행보를 해나갈 것이라는 얘기인 것이다. 그는 “가족끼리 잘 풀어나가려고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아직 결정난 것은 없다”며 가족들의 역할에 선을 그었다.
특히 김씨는 최근 또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을 직접 경영한다거나 인수한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유가족이 경영경험이 없으니까 측면에서 도와준다는 것이지 경영에 참가한다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특히 김씨는 “사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유가족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우선은 전문 경영인들에게 회사의 경영을 맡기고 뒤에서 그냥 지켜볼 생각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씨는 경영에 참여하는 유가족의 범위와 관련해 자신을 포함한 딸 현정은씨(정몽헌 회장의 부인)와 사위(정몽헌 회장)의 친족에 국한될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이에 앞서 김씨는 정몽헌 회장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현대엘리베이터 등 그룹계열사의 임원들로부터 경영과 관련한 현황브리핑을 받았다. 이 같은 현황브리핑은 앞으로도 받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눈길을 모으는 사람은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씨의 역할. 현씨는 남편이 사망한 뒤 정상영 명예회장을 자주 찾아가 회사 경영에 관한 조언과 현대그룹의 경영에 대한 조언을 듣고 있다. 따라서 향후 현대그룹의 경영은 김문희-현정은씨 모녀가 주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