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널 팬들 ‘성 토터링엄의 날’ 즐기며 20여 년간 토트넘 팬 조롱하기도
북런던 더비에 나선 손흥민. 그는 “아스널 홈구장에서 넣는 골은 더욱 특별하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
#크리스마스에도 ‘붉은색’은 금물
손흥민이 활약하고 있는 토트넘 홋스퍼는 영국 런던의 지역 맞수 아스널과 북런던 더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들의 경쟁심은 영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준이다. 손흥민이 토트넘으로 이적할 당시 과거 이를 경험했던 이영표는 “토트넘 크리스마스 파티에선 산타 클로스도 파란색이다. 붉은색(아스널 상징)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조언을 전하기도 했다.
아스널의 토트넘을 향한 증오심도 만만치 않다. 아스널 팬들이 1년 중 가장 즐거워하는 날 중 하나는 ‘성 토터링엄의 날(St. Totteringham‘s Day)’이다. 시즌 막판, 자신들의 순위가 토트넘보다 높다는 것이 확정된 날을 기념일로 정해 즐기는 것이다. 사실상 토트넘을 향한 조롱에 가깝다. 2016-2017시즌 토트넘이 2위를 차지하며 5위에 머문 아스널에 앞서기까지 토트넘 팬들은 약 20여 년간 아스널 팬들의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의 이 같은 관계는 북런던 더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가까운 거리에서 비롯됐다. 현재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과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아스널 홈구장)의 거리는 7km 정도다. 과거에 비하면 멀어졌다. 이들의 이전 홈구장(화이트 하트 레인과 하이버리 스타디움)의 거리는 이보다 가까웠다. 가까운 거리에서 경쟁심을 더욱 키워간 것이다.
밀라노 더비는 호나우두(오른쪽), 마르코 마테라치 등 수많은 스타들이 거친 세계 최고 더비 중 하나다. 사진=연합뉴스
#이웃에서 경쟁 상대로 발전한 라이벌
토트넘과 아스널같이 같은 지역 내 라이벌은 세계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런던 내에서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밀월 FC의 동런던 더비는 가장 과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밀월은 구단 역사 대부분을 2부리그와 3부리그에서 보낸 작은 팀이지만 과격한 팬들의 성향은 세계적으로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경기장 안팎에서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또 다른 세계적인 지역 라이벌 관계은 인터밀란과 AC 밀란의 밀라노 더비다. 이는 한때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전성기와 맞물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청자가 즐겨 보는 축구경기였다. 호나우두, 하비에르 사네티, 파올로 말디니, 안드리 솁첸코 등 이를 거쳐 간 전설적 스타들이 즐비한다. 국내 축구계 관계자는 “세계 200개 가까운 나라에서 생중계되는 밀라노 더비가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은 축구가 인기 없는 나라”라고 평가할 정도다.
#정치적, 종교적 문제로도 싸운 이들
하지만 같은 연고에 있다고 해서 항상 라이벌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최고 인기 클럽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연고지 내 맨체스터 시티와 더비 매치를 치른다. 하지만 이들의 경쟁심이 뜨거워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맨시티에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기 전까지 이들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맨유가 오랜 기간 잉글랜드 리그 패권을 쥐고 있는 동안 맨시티는 하부리그를 오가는 신세였다.
맨유의 오히려 7km 정도 떨어진(홈구장 기준) 맨시티보다 50km 이상 떨어져 있는 리버풀에 대한 경쟁심이 강하다. 이들은 노스웨스트 더비로 불리는 라이벌이다. 하부리그를 전전했던 맨시티와 달리 이들은 오랜 기간 잉글랜드 리그 정상을 두고 다퉈왔기에 라이벌 의식이 특별하다. 선수 시절 치열하게 싸우던 개리 네빌(맨유)과 제이미 캐러거(리버풀)가 유니폼을 벗은 이후로는 해설자로 스튜디오에서 특별한 ‘케미’를 보여줄 정도다.
레알과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도 실은 같은 연고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이들 또한 리버풀과 맨유처럼 오랜 기간 리그 패권을 놓고 경쟁 의식을 키워왔다. 엘 클라시코에는 축구 외적인 요소도 존재한다. 20세기 중반 스페인에서 이어진 프랑코 독재 시기, 바르셀로나가 저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나 인사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한다. 2000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 선수 중 한 명인 루이스 피구가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로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다시 한 번 라이벌 의식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2019년 10월로 예정됐던 엘 클라시코는 카탈루냐 독립 시위가 격해질 것을 우려해 12월로 연기되기도 했다. 사진은 경기장 주변에서 카탈루냐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 사진=연합뉴스
때론 종교가 라이벌 관계의 성립 배경이 되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고 있는 셀틱 FC과 레인저스 FC의 ‘올드펌 더비’는 종교적 갈등으로 서로 감정을 키워왔다. 레인저스 지역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레인저스는 개신교 신자 팬들이 대부분이었고,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위해 1887년 창단된 셀틱은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양 팀의 경기는 종교전쟁의 색깔을 띠었고 서로간 감정이 극심하던 시기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선수는 그 팀에 뛰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폭력이 동반된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경기장 안팎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때론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차츰 종교적 문제가 완화됐고 2010년대 들어 레인저스의 재정적 문제로 양 팀의 규모에 차이가 벌어지면서 과거에 비해 극단적 모습이 줄어들었다.
유럽 축구의 시즌 일정이 후반기로 내달리고 있지만 축구팬들의 가슴 뛰게 할 라이벌 경기는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북런던 더비를 포함해 머지사이드 더비(리버풀-에버튼), 레비어 더비(보루시아 도르트문트-샬케 04), 이탈리아 더비(유벤투스-인터밀란) 등이 예정돼 있다. 각각의 독특한 역사가 흥미를 돋우는 유럽 축구 라이벌전, 앞으로는 이들이 어떤 역사를 써내려 갈지 관심이 집중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