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가치 높아 vs 절판 유지 받들어야…“재단이 나서 교통정리 해야” 의견도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10주기를 맞아 관련 도서가 쏟아져 나오면서 출판계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2월 19일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 입적 10주기 추모 법회에서 참석자가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폐암으로 투병하던 법정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법정은 유서에 “그동안 풀어 논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남겼다. 법정의 제자들은 법정의 초재가 열렸던 같은 해 3월 17일 유서 원본을 공개했다. 유서 진위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출판사들은 같은 해 12월 31일을 끝으로 법정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책을 절판하기로 했다. 절판되기 전 법정 관련 도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도 했다.
법정 10주기가 다가오자 출판사들은 법정 유지를 뒤로하고 앞 다퉈 ‘법정 10주기 특별판’을 내놓고 서점은 법정 도서 특별 진열대를 만들기 바쁘다. 물론 불가에선 음력으로 기일을 따지기 때문에 2월 19일(음력 1월 26일)로 이미 법정 10주기는 지났다. 법정 관련 도서는 흥행이 보장된 도서다. 2020년 1월 출간된 한 책은 한 달 만에 5만 부 넘게 팔렸다고 전해진다. 법정의 유지를 훼손할 수 없어 책을 내지 않고 있는 일부 출판사는 남모를 속앓이를 하고 있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법정 관련 도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법정이 살아생전 출간했던 책들이 새 단장한 뒤 나오는 경우다. 둘째, 법정이 살아생전 출간했던 저서 내용을 발췌해 출판사가 재편집한 경우다. 셋째, 법정의 가르침이나 단상을 토대로 법정에 대해 기술하는 경우다. 세 번째 방법을 쓰는 경우엔 책의 저자가 법정이 아니다. 그렇지만 출판계에선 법정이 쓴 책을 출간하지 않은, 저작권이 없는 출판사가 법정 특수에 편승하기 위해 쓰는 일종의 ‘꼼수’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법정스님 생전 모습. 사진=연합뉴스
법정 관련 저서 재출간이 가능한 배경엔 ‘맑고향기롭게’ 재단이 있다. 법정 저서의 출판권을 갖고 있는 출판사들은 법정 저서의 모든 저작권을 갖고 있는 맑고향기롭게 재단과 협의한 뒤 법정의 저서를 다시 출간하거나 재편집해서 출간하는 방식으로 책을 내고 있다. 결국 법정의 대리인인 맑고향기롭게 재단이 법정의 유지를 앞장서서 어긴 셈이다.
맑고향기롭게 재단은 법정이 살아생전 이끌던 봉사활동 단체다. 법정은 저서 저작권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맑고향기롭게에 넘겼다. 법정은 유서에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맑고향기롭게에 주어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맑고향기롭게 재단은 2019년 11월 법정의 미출간 원고를 책으로 엮어냈고, 오는 4월 법정의 저서를 전자책으로 출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맑고향기롭게 관계자는 “일부 출판사의 재정 사정이 어려운 것을 감안해 한시적으로 출간을 허용해준 것이다. 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출판사였기 때문이다. 한시적인 것일 뿐 모든 책의 재출간을 허용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재 절판한 지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든 출판사들이 갖고 있는 출판 계약기간은 소멸됐다. 모든 저작권은 맑고향기롭게 재단이 가지고 있다. 4월엔 전자책을 만들어 무료로 홈페이지에 게재할 것”이라며 “영리적인 목적이 아닌 스님의 사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출판사 관계자는 “절판 당시 작성한 합의서에 절판 기간은 남아 있는 계약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분명 들어가 있다. 전자책을 만들지 않겠다는 내용도 들어가 있다. 만약 재단이 지금 계획을 밀고 나가면 분쟁이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일요신문이 입수한 당시 작성된 합의서엔 ‘출판권 설정 계약에 따른 출판 기간은 절판 기간만큼 연장된 것으로 보고 갑(맑고향기롭게)은 동 기간 내에는 전집류, e-book(이북·전자책)을 출판하지 않는다’라고 기재돼 있다.
법정 저서의 저작권 가운데 출판권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들은 억울한 점도 있다. 현재 법정 주요 도서 출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출판사는 6곳 정도다. 대부분 출판사들은 법정과 끈끈한 인연을 맺어온 터라 그의 유지를 받들고자 책을 재출간하지 않았다.
그 사이 다른 몇몇 출판사들이 등장해 법정 관련 저서를 내놨다. 법정이 생전에 했던 말과 글을 엮었지만 제3의 저자가 법정을 회상하며 기술하는 방식의 책을 출간했다. 책 제목엔 법정 대표 저서인 ‘무소유’, ‘법정 스님’ 등을 집어넣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독자들이 법정 저서로 인식해 책을 사도록 하는 방법이다. 법정 저서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쓴 출판사가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패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 다른 출판사 대표는 “법정 정신을 훼손하는 법정 관련 ‘꼼수’ 저서는 계속해서 나오고 독자들의 수요도 계속되는 상황이 10년 동안 이어졌다. 사실상 법정 저서 출간이 용인되는 분위기에서 우리만 책을 내지 않을 수만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법정 입적 10주기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서점들도 지금은 절판됐지만 과거 다 팔지 못하고 남겨뒀던 책 재고를 다시 꺼내기도 한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저서의 출판을 멈춰달라고 한 법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10년이나 지난 만큼 문학적 가치가 큰 법정의 수필을 재출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다. 법정 스님 입적 10주기 추모 법회에서 참석자들이 영상 법문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독자들은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고 책을 산다. 최근 법정이 쓰지 않은 법정 관련 책을 산 박 아무개 씨(27)는 “평소 법정 스님을 존경해왔다. 그냥 책 표지에 ‘무소유’, ‘법정 스님’이 있길래 법정 관련 책이 다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해 샀다. 그 내막은 잘 모른다”고 답했다.
한국전자출판학회장인 김기태 세명대 교수는 “저작권법에선 인용만을 허락한다. 인용이 성립하려면 법정 스님이 한 말을 토대로 저자의 생각을 펼쳐야 한다”며 “단순히 법정 스님 말과 글을 짜깁기한다면 편집저작물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정 수필의 문학적 가치가 높은 만큼 도의적·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법정 저서를 다시 출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민족문제연구소장인 임헌영 문학평론가는 “법정의 저서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완벽히 이뤄지지 않은 통일, 민주화, 환경에 관한 고귀한 정신이 담겨 있다. 도의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재출간할 문학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출간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갈등을 빚기보단 수익을 어떻게 의미 있게 쓸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맑고향기롭게 재단이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맑고향기롭게 재단이 법정 스님 관련 저서를 재출간할 계획이라면 현재 저작권을 가진 출판사들과 협의를 거쳐 일괄적으로 출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두가 출간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몇몇 출판사에게만 출판을 허용하는 등의 일관되지 않은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권리는 왜 넘겼나” 유서 진위 논란 여전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서의 진위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법정과 가까웠던 관계자들은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말을 아꼈다. 공개된 법정 스님 유서 원본. 사진=제보자 법정과 함께 작업했던 출판사 관계자는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전혀 절판 관련해서 말한 적이 없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전혀 내비치지도 않았다. 당신이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사전에 양해를 구하든 협의를 했을 것”이라며 “당시 투병 중으로 법정 스님이 어떻게 유서를 작성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장인 임헌영 문학평론가는 “자신의 저서를 절판하라는 유언은 문학계에서 아주 드문 일이다. 자신의 저서를 절판해달라고 했으면서 자신 저서의 권리를 특정 재단에 넘긴다는 것 또한 모순”이라며 “맑고향기롭게 재단에서 이런 의혹에 관해 투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법정 제자들 사이에 알력 다툼으로 법정의 유서가 조작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특히 법정은 유서에서 제자 가운데 맏상좌였던 덕조 스님에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결제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고 전했다. 덕조는 법정이 투병할 때도 법정을 만나보지 못했고, 법정 초재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곧바로 수행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덕조가 알력 다툼에서 밀린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맑고향기롭게 관계자는 “법정 스님이 병상에 있어 위중했던 건 맞다. 변호사와 법무사 입회하에 법정 스님이 유언으로 하신 말씀을 상좌(제자)들과 류시화 작가, 유언집행위원장 등 관계자 10여 명이 모여 정리를 해서 유지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입장 차이가 있었다. 유지가 조작됐다는 오해가 이 때문에 나온 것 아닌가 한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유지”라고 설명했다. 박현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