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권 전문가에 경쟁사 ‘적장’ 출신 등 추천 파격…여성 사외이사 약진도 눈길
주총이 다가오면서 기업들은 속속 새로운 사외이사 후보자들을 공개하고 있다. 일요신문이 3월 5일까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된 상장사의 정기 주주총회 안건과 업계 관계자들을 취재한 결과, 새 사외이사 추천 과정에서 파격을 선택하거나 경쟁사에서 근무하던 적장을 모시는가 하면, 향후 안팎으로 달라질 사외이사 역할을 위해 선제적인 조치를 취한 기업이 적지 않았다. 기업들이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대기업의 주주총회 전경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없다. 사진=최준필 기자
# 변화와 파격 사이
정기 주총을 앞두고 사외이사가 교체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다만 올해는 기업들의 고민이 유난히 깊었다. 사외이사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상법 시행 개정안이 지난 1월 말 즉시 시행되면서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사외이사를 내보내고 새 사외이사를 서둘러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기 주총이 열리는 3월까지 불과 두 달 사이에 코스피와 코스닥 556개 상장사가 총 718명의 사외이사를 한꺼번에 교체하게 된 탓에 기업들 사이에선 ‘역대급’으로 표현되는 구인난이 벌어지기도 했다(관련기사 ‘거수기’ 단김에 빼려니…기업들 사외이사 모시기 대란).
삼성은 사외이사진 변화 폭이 클 것으로 예상된 곳 중 하나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사내이사에서 물러나면서 이사회에서 오너의 입지가 작아졌고 새롭게 출범한 외부 독립기구 준법감시위원회와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점 등에서 이번 주총을 계기로 사외이사를 비롯한 그룹 전반의 이사회 구성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임기 6년을 채워 교체해야 하는 사외이사도 6개 계열사 13명이었다.
삼성은 임기만료에 따른 교체폭보다 대상을 늘렸다. 최근 16개 상장 계열사 가운데 8개 계열사가 17명의 사외이사를 새로 추천했다. ‘준법경영’과 ‘노조와해 전력’을 의식했다는 것이 재계의 평가다. 계열사 가운데 가장 많은 사외이사를 교체(4명)할 계획인 삼성SDI는 인권과 노동 정책 분야에 힘을 실었다. 인권에 전문성이 있는 김덕현 변호사와 노동 전문가로 통하는 박태주 고려대 선임연구원이 대표적이다.
삼성 계열사에 새로 추천된 사외이사들이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덕현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 중 한 명이었고, 박태주 연구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노동개혁 태스크포스 비서관을 지냈다. 삼성물산도 정병석 한양대 경제학과 특임교수를 내정했는데, 그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대내외적으로 투명경영과 무노조 관행을 깨겠다고 천명한 만큼 노동 인권 전문가의 시각을 반영했다”며 “현 정권과의 소통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화그룹에선 철학 전공 사외이사가 나왔다. 그동안 한화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그룹들은 관가나 법조계, 경영·경제계 출신을 중심으로 사외이사진을 꾸려왔다. 한화가 기업 경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학계의 사외이사를 선임한 것은 이례적이다. 주인공은 이석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주)한화 사외이사를 맡게 됐다. 한화 관계자는 “기업이 가진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더 나은 방향의 내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해달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카카오에선 1990년대 생 사외이사를 추천했다. 올해 31세인 된 박새롬 성신여대 융합보안공학과 조교수로, 카카오 이사회 구성원 가운데 최연소다. 네이버와 넷마블, 엔씨소프트 등에도 1980~1990년대 생 사외이사가 없다. 그동안 카카오는 이사회뿐만 아니라 임원들의 연령대를 점차 낮추면서 젊은 피를 수혈해왔다. 박새롬 교수가 사외이사가 되면서 평균연령이 더 큰 폭으로 낮아지게 됐다.
#여성 사외이사 약진
올해를 기점으로 여성 사외이사들의 약진도 두드러질 전망이다. 지난 1월 “자산 2조 원 이상의 상장 법인은 이사회를 특정 성(性)의 이사로 구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서다. 기업 사외이사진에 다양성과 폭넓은 관점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처벌 조항도 없고 시행일도 오는 하반기로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선제적으로 추천했다는 게 관련 기업들의 설명이다.
실제 앞서의 삼성과 카카오, 금융권 등을 비롯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적지 않은 상장사들이 여성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남성 중심 업종으로 통하는 조선과 철강 업체의 발 빠른 움직임이 눈에 띈다.
삼성중공업과 세아베스틸이 각각 조현욱 변호사와 윤여선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장을 추천했다. 조현욱 변호사는 부장판사 출신으로 한국여성변호사회장,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등을 지냈다. 삼성중공업은 “여성 사외이사라는 점보다는 법조인이자 다양한 사회활동 경험자로서 준법경영에 기여해달라는 취지로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윤여선 원장은 카이스트경영대학원 마케팅 교수 및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세아베스틸은 윤 원장이 산업현장의 변화를 밀접하게 연구해온 만큼 산업간 융합을 통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추천했다고 밝혔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임원 중에서도 여성이 거의 없어 사외이사 선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올해는 추천하지 못했다”며 “내년부터는 업계 전반에서 추천이 이뤄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관련법 개정과 재계 기조 변화 등으로 기업들의 사외이사진 구성에도 큰 폭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여의도 증권가 야경. 사진=고성준 기자
# 금융권, 적장 모시거나 관료 출신을 뽑거나
금융권 사외이사는 다른 분야의 사외이사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 등 최고경영자 인사에 힘있는 목소리를 내는 등 ‘킹메이커’로 통한다. 특히 3월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 임기가 만료되고, 오는 4월에는 김광수 NH농협금융그룹 회장, 11월과 2021년 3월에는 각각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과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 등 주요 금융그룹 회장들이 잇따라 임기를 마치는 만큼, 지난해 말부터 주요 금융그룹 사외이사 교체 여부에 금융권 관심이 적지 않았다.
금융권에서 가장 빠르게 사외이사 모시기에 나선 곳은 KB금융과 씨티은행이다. 이들은 경쟁사 출신, 즉 ‘적장’을 모셔오면서 눈길을 끌었다. KB금융은 권선주 전 기업은행장을 새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권선주 전 행장은 행원으로 입행해 리스크관리본부장과 금융소비자보호센터장을 거쳐 은행장까지 올랐다. 국내 최초 여성 은행장이라는 타이틀도 있다. 씨티은행은 지동현 전 KB금융지주 부사장을 신임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지 전 부사장은 조흥은행 부행장을 거쳐 LG카드 부사장을 지냈다. KB국민은행 연구소장, KB금융 전략 담당 부사장도 역임했는데, 지금의 KB국민카드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신한금융은 윤재원 홍익대학교 경영대학 교수와 진현덕 페도라 대표이사, 총 2명의 사외이사 후보를 새롭게 추천했다. 윤 후보자는 회계학을 전공한 회계 및 세무 분야의 석학이다. 윤 후보자가 이번 주주총회에서 선임이 확정되면 신한금융 이사회 구성원 중 유일한 여성 사외이사가 된다. 1970년 생으로,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진현덕 페도라 대표이사는 복합문화시설 사업을 하고 있다. 2개 대학에서 경영학을 강의하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를 선임할 계획이다. 최근 남기명 국무총리실 산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립 준비단장을 사외이사로 추천했다. 남 후보자는 지난 2월 5일 단장으로 위촉됐고, 설립준비단은 10일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불과 한 달 만에 공수처 설립단장과 은행 사외이사 겸직이 결정된 셈이다. 남 단장은 행정고시 18회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30년간 법제처에서 근무하다 참여정부 시절 법제처장(장관급)을 지냈다. 현재 공무원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공무원법상 겸직 제한은 받지 않는다.
남 단장과 함께 추천된 유재훈 전 한국예탁결제원 사장도 관료 출신이다. 행정고시 26회로 금융감독위원회 시절 국제협력과장과 은행감독과장을 지냈다. 2009년 기획재정부 국고국장도 역임했다. 은성수 현 금융위원장의 한 기수 선배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