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필리스 마이너 캠프 연수 중 “새벽 출근에 할 일 엄청 많지만 미국 야구 경험 행복”
미국 플로리다주 클리어워터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필리스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만난 이범호(39) 이야기다. 이범호는 KIA 타이거즈의 지원을 받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는 중이다. 새벽 5시 30분에 출근해 저녁 7시에 퇴근하는 일상은 육체적인 고단함을 주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 만족, 보람 등을 느끼게 한다고. 실제 이범호는 훈련 내내 짧은 영어로 선수들과 소통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2019년 7월 은퇴 후 9, 10월에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귀국한 그는 2월 초부터 필라델피아 캠프에 입성, 본격적으로 미국 야구를 배우고 함께 공유하면서 또 다른 야구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이범호와 인터뷰를 정리한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있는 이범호를 만났다. 사진=이영미 기자
―보통 출퇴근 시간이 어떻게 되나.
“일정한 편이 아니다. 어떤 날은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기도 하고, 어제는 새벽 5시 30분에 나와서 저녁 7시에 퇴근했다. 매일 아침 미팅이 있고, 오후에는 다음날 스케줄과 관련해 또 미팅을 한다. 마이너리그의 고단함은 선수들뿐 아니라 코치들도 함께 느끼는 것 같다.”
―마이너리그 캠프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몇 명 정도 되는지 궁금하다.
“메이저리그 로스터 40명을 제외하면 160명 정도가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훈련 중이다. 필라델피아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캠프가 붙어 있어 선수들이 더 많아 보인다.”
―훈련량이 엄청난 것 같다. 취재하면서 지켜봤는데 선수들이 쉼없이 오가는 모습이었다.
“나도 이토록 훈련 프로그램이 많을 줄 정말 몰랐다.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면 저녁에는 비행기 30시간 이상 탄 것처럼 다리가 퉁퉁 부어 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배팅볼 던지거나 외야 수비하면서 움직이는 게 더 나을 정도다.”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지도자 연수까지 받은 그는 “왜 미국 야구를 배워야 하는지 깨닫는 중”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사진=이영미 기자
―오늘 보니까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더라.
“행복하다. 시간이 갈수록 왜 미국 야구를 배워야 하는지 깨닫는 중이다. 아침에 스태프 미팅하는 자리에 단장부터 코치들, 트레이닝 파트까지 모두 모이는데 거의 대부분 표정이 밝다. 마치 야구에 모든 걸 바친 사람들처럼 즐겁게 일한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절로 환한 얼굴이 된다. 안 웃을 수가 없다. 얼굴 표정이 좋아야 선수들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웃고 다닌다.”
―마이너리그도 여러 레벨로 나뉘는데 어느 팀을 맡게 되는 건가.
“필라델피아는 루키부터 상하위 싱글A팀이 모두 클리어워터에 모여 있다. 3개 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팀들을 오가면서 코치 연수를 받을 예정이다. 지금은 트리플A 선수들도 이곳에 있는데 캠프가 마무리되면 각자 팀으로 돌아가고, 나는 이곳에서 루키와 싱글A팀 선수들과 함께 지낼 것 같다.”
이범호와 인터뷰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갔다. 모두 한두 마디씩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는 기본이었고, “커피 뜨거워” “매워”라고 외치는 목소리도 들렸다. 어떤 선수는 촬영하는 기자에게 “코리안 하트”라며 손가락 하트 표시를 해보였다. 이 모든 건 이범호가 노력한 ‘흔적’들이다. 선수, 코치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할 때마다 쉬운 인사말 등을 알려준 덕분에 필라델피아 마이너리그 캠프에서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 인사가 정겹게 들린다.
―불과 한 달여밖에 안됐는데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한국어를 많이 배운 것 같다.
“영어가 기본이고 남미에서 온 코치, 선수들이 사용하는 스페인어 외에 한국어가 더 추가됐다. 나도 영어, 스페인어를 배우니까 다른 이들도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나섰다. 나랑 친하게 지내는 베네수엘라 코치가 있는데 나보다 한 살이 많다. 스페인어로 ‘형’을 ‘알마누’라고 부르기에 나는 그 코치에게 한국어로 ‘동생’을 알려줬다. 그래서 내가 그를 ‘알마누’라고 부르면 그는 내게 ‘동생’하고 대답한다(웃음).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적응력은 뛰어난 편이다. 사실 여기까지 와서 적응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은퇴 후 코치하는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선수 때가 더 좋았다’는 것인데, 실감하나.
“격하게 실감 중이다. 선수 때는 내 할 것만 하면 되지 않았나. 내 표정이 좋지 않다고 선수들 기분이 다운되는 건 아니니까 신경 안 쓰고 경기에만 집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침에 일찍 나와도 웃어야 하고, 밥이 맛이 없어도 웃는다. 이전에 코치님들이 ‘선수 할 때가 좋은 줄 알라’고 말씀하시면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코치, 특히 나처럼 초보 코치들은 단순히 선수를 가르치는 것 외에 훈련이 진행될 수 있도록 일찍 나와서 많은 준비를 해놓는다. 선수들이 훈련과 시합을 잘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도와야 한다. 그게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걸 꼽는다면.
“언어가 가장 힘들다. 선수 시절에 영어 좀 미리 배워뒀더라면 조금 더 편하게 생활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어느 정도 영어를 하게 된다면 배우는 속도가 훨씬 빠를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나.
“당연하다. 일본 야구는 선수 생활부터 짧은 코치 연수까지 접해봤지만 미국은 처음 아닌가. 여기서는 미국 야구만 아니라 도미니카공화국, 베네수엘라 등 남미 야구도 경험할 수 있다. 한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정말 좋다.”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선수들 야구하는 거 보면서 선수로 뛰고 싶다는 생각도 들 텐데.
“선수로 다시 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미국에서 야구하는 꿈을 키울 것 같다. 야구 선수라면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2009년 시즌 끝나고 FA(자유계약선수)가 됐을 때 적은 금액을 받더라도 미국 진출을 꾀했어야 했다는 후회도 있다.”
―당시 영입 제안을 해온 메이저리그 팀이 있었나.
“에이전트는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의 진위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미국 야구는 선수 생활 끝난 뒤에 인연을 맺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는 브라이스 하퍼, 앤드류 맥커친, 제이크 아리에타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하다. 직접 만나 봤나.
“하퍼와 아리에타는 우연히 걸어가는 모습을 봤고, 맥커친은 좀 전에 이 근처에서 러닝했다. 직접 대화를 못하더라도 그런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다. 여긴 빅리그와 마이너리그 캠프가 붙어 있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 같다.”
이범호는 “존재감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이영미 기자
이범호는 얼마 전 구단 관계자에게 마이너리그 선수가 빅리그에 올라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고, 몇 명 정도가 빅리그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추신수를 떠올렸다고 한다. 추신수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고,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신수도 그렇고 (박)찬호 형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여기 와서 더 절감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어려운 상황들을 버티고 이겨냈는지 알았다.”
이범호는 선수들한테 필요한 지도자가 되길 바랐다. 선수들 사이에서 “우리 팀에 그 코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존재감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준 KIA 구단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구단의 도움이 없었다면 미국 연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며 거듭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미국 플로리다=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