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에서 비화휴대폰을 지급했다고 주장한 한 나라당 박진 의원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통화하 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박진 의원(한나라당)은 최근 정보통신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통신 파트에서 지난 4월 초 특수칩을 부착한 비화 휴대폰을 비서관급 이상 청와대 직원과 일부 국무위원들에게 지급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최근 수년간 논란을 빚어온 휴대폰 도청 시비는 ‘비화 휴대폰’ 논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문제의 ‘비화 휴대폰’은 아이러니하게도 박 의원의 소속당 총재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최초 사용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18일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씨는 과학기술단체 초청 토론회에서 “본인의 휴대폰이 도·감청될 수 있다는 우려로 그동안 서너 개의 휴대폰을 갖고 다녔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당시 “도·감청을 방지하는 ‘비화(秘話)’ 칩이 장착된 휴대폰 2개를 입수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이 비화 휴대폰은 국내의 한 벤처기업이 시제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휴대폰은 음성신호의 암호화 단계를 기존 제품보다 복잡하게 만들어 대화내용을 알 수 없도록 한 제품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비화 휴대폰을 만든 회사는 어디일까.
이번 국정감사에서 권영세 의원(한나라당)은 “이동통신 단말기 제조사인 팬택앤큐리텔이 비화폰을 개발하고 지난 2월 신제품 설명회를 가졌지만 국정원의 저지로 시판하지 못했다. 당시 선보인 시제품 2백 개는 해당 업체에서 긴급 회수했다”고 주장했다.
권 의원의 말을 빌면 비화 휴대폰을 처음 개발한 곳은 팬택앤큐리텔이었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게 이 비화 휴대폰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이에 대해 팬택앤큐리텔은 “비화 휴대폰을 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에게도 비화 휴대폰을 제공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팬택은 지난 2월3일 비화 휴대폰 모델인 DD630을 개발했다고 공식 발표하고, 기자간담회까지 열었다. 이 비화 휴대폰은 포항공대 이필중 교수가 기술지원을 했으며, 현재 팬택이 이에 대한 특허권을 갖고 있다.
팬택앤큐리텔은 당시 발표에서 “비화 휴대폰이 제기능을 발휘하려면 수신자와 발신자 모두 같은 기종의 비화 단말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팬택의 비화 휴대폰은 미국 퀄컴사에서 개발한 CDMA칩 내부에 비화용 암호화 프로그램을 설치한 것. 비화 휴대폰을 통해 이뤄지는 통화내용을 감청하려면 암호를 푸는 데만 10년이 걸릴 정도여서 사실상 도·감청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해진다.
팬택이 선보인 비화 휴대폰의 기술을 전문 용어로 설명하면 기존 CDMA 칩에 덱스(DEX)라는 암호화 알고리즘 기술을 적용했다. 공개키가 아닌 암호키로 통화 메시지를 이중화해 암호를 풀지 못하면 도·감청이 불가능하다는 게 팬택측의 주장이다.
그러면 비화 휴대폰은 왜 시판되지 못하는 것일까. 국정감사에서 일부 의원들은 ‘팬택이 개발한 비화 휴대폰에 대해 정통부가 형식 등록을 거부함에 따라 시판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통부와 팬택의 주장은 좀 다르다. 팬택 관계자는 “비화 휴대폰은 기존 휴대폰을 불법 개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델로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정통부로부터 형식승인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개발 초기에 정통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불법 개조’ 질의가 있었지만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혀 불법 개조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팬택은 자사가 개발한 비화 휴대폰 DD630 모델이 현재 시판되지 않은 점이 논란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부분에 대해 매우 꺼려하는 눈치다. 팬택 고위 관계자는 “정통부에서 비화 휴대폰의 시판을 원천적으로 막으려 했다면 지난 2월 비화 휴대폰 개발과 관련한 기자간담회 개최 자체를 반대했을 것”이라며 정통부가 비화 휴대폰 시판을 막았다는 일부의 주장을 부인했다. 또 일부 국회의원들이 주장하고 있는 국정원 개입설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팬택측은 더이상 언급을 피했다.
비화 휴대폰의 시판이 막힌 배경에 외압이 없었다면 팬택앤큐리텔이 비화 휴대폰을 시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팬택측은 “지난 2월 기자간담회를 통해 비화 휴대폰이 일반에 공개된 이후 이 문제가 기존 휴대폰의 도·감청 논란으로 번지는 등 예상 밖의 부작용이 나타나 스스로 시판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도청방지’라는 첨단 성능이 엉뚱하게 ‘도청’이라는 사회 이슈로 번지면서 팬택으로선 뒷감당이 힘들었다는 것. 비화 휴대폰을 통해 기술력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도·감청 불가능하다’에서 ‘권력이 도·감청을 한다’는 논란으로 번져 제품을 시판하기가 부담스러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도 비화 휴대폰의 시판을 스스로 철회한 배경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화 휴대폰을 개발한 이유가 도·감청에 대한 우려 때문이고, 실제로 기존 휴대폰의 경우 유선 구간에서 도청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팬택 관계자는 “삼성도 비화 휴대폰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항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비화 휴대폰을 특정인에게 제공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팬택과 동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삼성전자도 지난해 도·감청을 방지하는 비화 휴대폰을 자체 개발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 비화 휴대폰을 제품화하지는 않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에 따르면 비화 휴대폰을 제품화할 경우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 효과는 있지만, 자칫 기존 휴대폰이 도청될 수 있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시장상황을 살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