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지켜야 할 우리 유산 [44] 천년 후 조선 왕도 인정한 빼어난 고대 문물의 산실
백제는 기원전 18년 건국되어 660년에 멸망하기까지 700년 가까이 존속했던 고대 왕국이다. 백제 문화와 관련해 ‘승정원 일기’ 인조 8년(1630) 3월 20일자 기록에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띈다. 당시 인조가 공청도(현 충청도) 관찰사에게 맡은 지역을 잘 다스리라며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 중에 “비록 백제 문물의 영향이 남아 재력이 평소에 축적되어 있다고는 하나…”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 1000년 전에 멸망한 나라임에도 먼 후대인 조선의 임금이 그 영향을 거론할 만큼 백제의 문화가 빼어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진 시대의 유적인 공주 공산성(옛 웅진성)은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왕성으로 쓰였다. 사진=연합뉴스
백제의 역사는 수도의 위치에 따라 한성(현재의 서울) 시대, 웅진(현 공주) 시대, 사비(현 부여) 시대 등 크게 3기로 구분되는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이 가운데 웅진, 사비 시대(475~660년)와 관련이 있다. 즉 5~7세기 한국,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왕국들 사이의 교류와, 그 결과로 나타난 건축기술의 발전과 불교의 확산을 보여주는 고고학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웅진 시대의 유적으로는 공주 공산성(옛 웅진성)과 송산리 고분군을 들 수 있다. 공산성은 백제가 웅진에 수도를 두었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약 63년간 왕성으로 쓰였던 산성이다. 공산성 내부 서쪽 산봉우리 정상에는 대형 건물터와 왕궁 내 용수조달 시설인 연못과 저장시설 등 왕궁지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성안마을’로 불리던 분지 지역을 발굴·조사한 결과 건물지, 축대, 계단지와 도로, 저수시설과 배수로 등의 유구(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발견되었다.
특히 저수시설에서 출토된 ‘옻칠한 가죽 갑옷’은 백제와 당나라 간의 교류를 확인시켜 주는 실물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고대 우리나라와 중국 역사책에 의하면 백제는 ‘명광개’를 만들어 당나라에 수출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 갑옷이 명광개의 실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명광개란 백제 때 사용되던 갑옷의 하나로 황칠을 하여 그 광채가 상대편의 눈을 부시게 했다고 전해진다.
송산리고분군은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웅진 시대 백제왕실의 능묘군이다. 이 가운데 1971년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왕릉은 무령왕릉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령왕릉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는데, 동아시아의 왕릉으로서 피장자(무덤에 묻혀 있는 사람)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로 평가된다. 완벽한 상태에서 묘가 발견됨으로써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란 점이 밝혀졌으며 이들의 사망과 매장 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
부여의 중심부에 유치한 정림사지. 이곳에 세워진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한 탑으로서 비례의 미학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사진=연합뉴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무령왕대 백제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일본산 금송이 목관의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석상)와 도자기 등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국제적 교류가 동남아시아, 멀리는 인도 지역과도 이어졌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도 관찰된다. 출토된 유리구슬에 사용된 납의 산지는 태국이며, 왕비 관식(관을 꾸미는 데 쓰던 물건)의 삽화(꽃꽃이) 문양은 인도 산치탑의 난간에 묘사된 문양과 동일 계열이다.
그 다음 시기인 사비 시대의 백제 유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첫째가 부여 사비성과 관련된 관북리 유적(관북리 왕궁지)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부여 나성 등이다. 관북리 유적에서는 대형 건물지(전각건물 터)와 상수도시설, 저장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부소산 정상에 축조된 부소산성은 왕궁의 배후산성으로 평상시에는 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산성 안에선 다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도 자리해 있다.
부여의 중심부에 유치한 정림사지는 수도 최고의 사찰이던 정림사의 터다. 이곳에 세워진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한 탑으로서 맹목적인 목조 양식의 모방에서 벗어나 비례의 미학과 창의성을 보여준다.
익산시 미륵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미륵사지. 본래 중원에 목탑, 동원과 서원에 각각 석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원의 석탑만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비 시대의 두 번째 유적지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익산시 지역에 위치한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2곳이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재위 600-641) 시절에 조성된 왕궁 유산으로 금제품, 은제품, 유리제품 및 그 원료, 도가니, 송풍관 등 다양한 종류의 생산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왕성 내부에 왕실 직속의 수공업 공방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미륵사지는 익산시 미륵산 아래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미륵사는 백제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에 창건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무왕 부부가 사자사로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본래 미륵사에는 중원에 목탑, 동원과 서원에 각각 석탑이 있었으나, 무겁디무거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듯 현재는 서원의 석탑만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자료 협조=유네스코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