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이 에버랜드 CB 발행과 관련된 고발장을 접수한 지 3년6개월 만에 삼성가의 ‘대물림 과정’에 칼을 들이댔다. 사진은 지난 2001년 삼성그룹의 임원이 된 이재용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 ||
검찰은 삼성에버랜드 CB(전환사채) 저가 발행을 주도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현 삼성석유화학 사장)과 박노빈 현 에버랜드 사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지난 2000년 6월 곽노현 방송대 교수 등 법학교수 43명이 검찰에 에버랜드 CB발행과 관련해 검찰(현재 특수2부에서 수사중)에 고발장을 접수한 지 꼭 3년6개월 만의 일이다. 고발장을 접수시킨 곽노현 교수는 검찰의 기소 사실이 알려진 이후 참여연대 홈페이지에 남긴 ‘검찰의 삼성기소, 평가와 당부’라는 글을 통해 “검찰이 월드컵 4강 진출보다 더 장한 일을 해냈다”며 “살아 있는 경제권력의 대물림 과정에 칼날을 들이대며 ‘경제대통령’ 이건희 회장의 역린을 도려낼 태세이기 때문”이라며 검찰의 공소 자체를 높이 평가했다.
LG, 두산 등 유사한 편법상속 사례가 있는 대기업에서도 삼성에 대한 처리에 예의주시하며 대책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특히, 향후 검찰이 이재용씨의 전환사채 매입 자금에 대한 출처조사로 수사 범위를 확대하고, 당시 삼성 비서실(현 구조조정본부) 차원의 조직적인 공모 여부로까지 수사범위를 확대할 것으로 보여, 삼성의 편법상속 수사는 대선자금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을 뛰어넘는 최대 핫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검찰의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임원에 대한 불구속 기소는 재계 서열 1위 삼성의 지배구조 근간을 통째로 뒤흔들 만큼 폭발성이 강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지난 96년부터 97년까지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벌어졌던 삼성의 편법상속 과정을 추적해봤다.
[96년 CB발행의 진실]
삼성에버랜드주식회사(당시 중앙개발주식회사)는 96년 10월 전격적으로 열린 이사회를 통해 99억5천4백59만원어치의 사모 전환사채를 발행키로 의결했다. 1주당 전환가는 7천7백원이었다.
당시 에버랜드의 대주주였던 중앙일보, 제일모직, 한솔, 새한, 신세계, 제일제당 가운데 제일제당만 전환사채를 인수했고, 나머지 계열사들은 계열분리 등을 이유로 실권(사채 인수를 포기하는 행위)했다.
특히 전환사채 발행 이전 에버랜드 주식의 48.2%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중앙일보와 14.1%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제일모직이 전환사채의 인수를 포기함으로써 전환사채 가운데 97%인 96억원어치의 전환사채는 이재용씨를 비롯, 이부진 이서현 이윤형씨 등 이건희 회장의 4남매 몫으로 돌아갔다.
전환사채를 인수한 이재용씨 등 4남매는 이를 곧바로 주식으로 전환, 이재용씨는 31.9% 지분(62만7천3백90주)을 보유한 최대주주가 되었고, 그의 누이동생 세 사람은 각각 20만9천1백29주씩을 보유하여 10.6% 지분의 2대 주주가 되었다.
전환사채 발행으로 이재용씨와 그 누이동생들은 단숨에 에버랜드 대주주에 오른 것이다.
2003년 9월30일 현재 지분율은 몇 차례 유상증자로 97년 상황과 다소 변동을 보이고 있다. 이재용씨가 25.1%로 1대 주주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삼성카드가 14% 삼성캐피탈 11.64%, 이부진 서현 윤형씨가 각각 8.37%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지분율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재용씨 형제들이 대주주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는 것이다.
[왜 에버랜드였나]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삼성 계열사 가운데 하필 에버랜드가 사채발행의 대상이었을까.
삼성의 편법상속 의혹을 끈질기게 추적해 온 참여연대에서는 에버랜드를 택한 이유로 가장 자산가치가 높고 우량한 ‘비상장회사’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에버랜드의 자본금은 지난 9월 말 현재 1백25억원이다. 그러나 이 회사의 자체 감사보고서를 보면 고정자산은 2조8천억원대에 이른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천3백억원의 매출을 올려 1천4백71억원의 당기순익을 기록했다.
이런 재무상황을 놓고보면 초우량기업이다. 다만 이 회사가 아직도 자본금 규모가 1백억원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자산재평가를 통한 자본금 증액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여기에 비상장회사란 프리미엄까지 있었으니 세칭 ‘작전’을 펴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것으로 참여연대는 보고 있다. 상장회사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려 할 경우 소액주주를 비롯, 주변에서 감시하는 눈이 많아 쉽지 않은 반면, 비상장회사의 경우 내부 거래를 통해 총수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저가 발행 누가 기획했나]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발행은 2세구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플랜이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이 플랜을 기획한 것일까.
핵심은 이건희-이재용 부자가 이 문제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하는 부분이다. 만약 이 플랜에 이들 부자가 개입한 것이 확인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게 뻔하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에버랜드가 93년 회사 주식을 주당 8만5천원에 거래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뒤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이건희 회장 자녀들에게는 주당 7천7백원에 넘겼다고 밝혀 의도적인 시나리오가 존재했었다는 점에 대해 무게를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더욱이 검찰이 에버랜드 전·현직 임원을 기소한 뒤, 전환사채 발행을 결의했던 이사회 회의에 결정적 하자가 있었음을 밝힌 대목도 주목된다.
문제는 당시 17명의 이사진 가운데 이사회 회의록에 참석한 것으로 기재돼 있는 9명의 이사 중 한 사람이 국내에 체류하고 있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진 것. 이사회 회의록이 조작됐을 가능성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전환사채 발언을 의결했던 이사회 회의 자체가 무효로 판명날 경우, 원인무효에 따른 또다른 효력 정지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이재용씨가 대주주로 등극한 이후, 중앙개발주식회사 당시 ‘용인 자연농원’으로 불리던 상호는 사명과 상호를 ‘에버랜드’로 변경했다. 세습체제를 완성한 기념으로 영원한 제국(ever land)의 달성을 만방에 표시한 것일까. 그러나 영원한 제국 ‘everland’는 전환사채 저가 발행에 따른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검찰의 불구속 기소를 계기로 적잖은 시련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