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일가 지배력 vs 금산분리 원칙’ 난제…지배구조 겨냥 법안 통과 가능성 높아 시간 많지 않아
그동안 삼성 지배구조 개편 작업은 고르디아스 매듭으로 통했다. 삼성그룹은 물론 정부까지 나서 각종 시나리오를 제시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찾지 못하고 있다. 근본 이유는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것이 암묵적인 필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남은 삼성 지배구조 개편 작업은 핵심 계열사 간 지분만 정리하면 말끔하게 처리된다. 그러나 이 경우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통째로 흔들린다. 지분 정리 과정에서 돈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도 자금이 모자라는 데다, 각종 규제 문제도 변수로 얽혀 있다.
그런데 최근 이재용 부회장의 ‘4세 경영승계 포기’ 선언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여기에 지난 4월 15일 총선에서 여대야소 구도가 되면서 삼성 지배구조를 직접 겨냥한 법안 통과 가능성이 높아져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이르면 올해부터 삼성이 본격적으로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착수할 것이란 관측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 앞서의 ‘고르디아스 매듭’도 풀리긴 했다. 알렉산더가 주인공이었다. 다만 알렉산더는 매듭을 푸는 대신 칼로 한 번에 잘라버렸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건물전경. 사진=일요신문DB
#‘답 없는 문제’ 풀던 삼성과 정부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은 재벌개혁을 강하게 추진하는 이번 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8년 4월 삼성SDI가 가진 삼성물산 주식(2.11%) 매각을 시작으로 2013년엔 80개에 달하던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끊어냈다. 현재의 ‘이재용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를 골격으로 하는 지배구조가 완성된 것은 이때부터다.
다만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오너일가의 직접 지배력은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건희 회장(4.18%), 이재용 부회장(0.7%),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0.91%) 등의 지분을 모두 더해도 5%대에 불과하다. 대신 다른 계열사들이 지배력을 보완해주고 있다. 삼성전자의 최대 단일주주로 삼성생명(지분율 8.51%)을 두고, 다시 삼성생명을 삼성물산이 지배하며(지분율 19.3%) 삼성물산의 최대주주가 이재용 부회장(지분율 17.08%)이 되는 식이다. 현재 구조로선 삼성생명 지분이 오너 일가가 삼성전자를 지배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금산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보험사의 자산은 대부분 가입자가 낸 보험료다. 금산분리는 금융사 대주주가 고객의 돈으로 다른 회사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번 정부 출범 직후부터 현재까지 정치권과 금융당국 등은 금산분리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해소하면서도 오너 일가가 안정적으로 지배력을 유지하는 게 삼성의 마지막 남은 숙제였다.
삼성은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한 사업지주와 삼성생명을 축으로 한 금융지주로 나누는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해왔다. 그동안 정부와 재계, 증권가 등에서 제시한 다양한 개편 시나리오는 앞서의 방안을 기반으로 나온 아이디어들이다. 그러나 어떤 시나리오를 선택하든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보유 지분을 정리해야 한다.
순환출자를 해소할 때와 같이 단순히 시장에 지분을 내다 팔 순 없다. 오너 일가 및 특수관계인의 삼성전자 우호지분이 크게 떨어져 지배력이 흔들린다. 이를 막기 위해선 삼성 계열사들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사줘야 하는데, 현재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가치를 시가로 계산하면 24조 원에 달한다. 개별 계열사가 살 수 있는 여력은 없고 나눠 사더라도 부담스러운 규모다.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으로 통하는 건 삼성생명이 들고 있는 지분 중 2%가량을 삼성전자의 2대주주인 삼성물산이 사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낸 아이디어다. 이에 따르면 삼성전자 최대주주가 비금융사인 삼성물산이 되면서 금산분리 원칙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정부 기조에도 따르는 모양새가 된다.
다만 이 경우 삼성물산은 지주사로 강제 전환된다. 공정거래법상 자회사의 지분가치가 자산총액의 50%를 넘으면 강제로 지주사가 되는데, 지주사행위제한 규제로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을 20%까지 의무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삼성물산이 지주사로 강제 전환돼 의무 지분을 확보하려면 현재 주가 기준으로 약 40조 원의 자금을 홀로 마련해야 한다. 현재 삼성물산 자산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삼성물산이 가지고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지분율 43.4%) 등 다른 자회사 주식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주식들을 극단적으로 대부분 팔아야 하는 데다, 특히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삼성물산의 미래 먹거리란 점에서 매각 결정은 쉽지 않다. 또 분식회계 의혹 수사가 진행 중인 탓에 활용 가능성도 낮은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5월 6일 대국민 입장발표에서 4세 경영권 승계 포기 선언을 했다. 과거보다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서 선택지가 더 늘어났다는 해석이 나온다. 사진=최준필 기자
#그렇다고 손놓을 순 없다
삼성이 해답 없는 문제를 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손놓고 있을 순 없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일명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지난 4월 21대 국회에서 다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 법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대부분 매각해야 한다.
개정안의 골자는 보험회사가 3% 이내로 보유할 수 있는 계열사 채권이나 주식가치를 현재 ‘취득원가’ 기준에서 ‘시장가치’로 바꾸는 것이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의 시장가치(약 24조 원)는 취득원가(5000억 원대)의 50배다.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을 약 8조 원어치만 들고 있을 수 있다. 나머지 16조 원어치는 매각해야 한다.
‘삼성생명법’이 통과돼도 유예기간은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도 21대 국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 개정안은 지주사로 전환할 경우 자회사와 손자회사 의무 보유 지분율이 현행 20%에서 30%로 늘어난다. 이 법안은 통과되면 유예기간이 없다.
법안 통과 전까지 삼성그룹이 지주사를 만드는 등 다른 뾰족한 해법을 찾지 않는 이상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일가는 삼성생명 또는 삼성전자를 포기해야 한다. 사실상 편법에 기대지 않으면 오너 일가의 지배력 유지와 금산분리 원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이 사재를 털어 계열사들이 매각해야 할 지분을 사들이는 방법도 있지만 재계 서열 1위 그룹의 오너라도 개인이 현금으로 마련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앞서 이 부회장은 대국민 입장발표에서 ‘4세 경영권 승계 포기’와 함께 ‘준법 경영’도 강조했다. 이미 경영권 승계 의혹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직접 공식적으로 선언을 한 만큼 편법으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시도할 순 없다. 시간은 촉박해지고, 총수가 직접 새로운 경영 시스템 도입을 예고하면서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관련해 과거보다 선택지가 더 늘어났다.
증권가와 재계에선 삼성이 앞으로 지분을 조금씩 나눠 파는 식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착수할 것이란 관측이 조심스레 나온다. 시장은 벌써부터 반응하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그동안 시장에서 인기가 없던 삼성물산 주가가 움직였다”며 “회사의 실적이나 다른 변화보다는 지주사로서의 역할을 시장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삼성이 급하게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착수하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배구조 개편이나 지분 해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삼성도 아직까지 구체적인 개편 방안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삼성이 지배구조가 불완전하다는 지적에도 경영과 투자 등 의사결정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는 만큼 당장 무리하게 개편 작업을 시작할 이유는 없다”며 “다만 현재 언급되는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 시스템 도입이든, 삼성만의 새로운 시스템이든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우선 마무리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언제까지고 미룰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