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총선 맞대결 승리 이해찬, 20대 총선에선 ‘김종인 칼날’에 컷오프, 차기 대선은?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6월 3일 오전 국회 당대표 회의실에서 취임 인사차 예방한 미래통합당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4년 전엔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은 6월 3일 이해찬 대표를 만나 과거 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을 언급했다. 당시 김 위원장이 휘둘렀던 칼날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 출마를 해야 했던 이 대표로선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 만한 발언이었다. 15분가량 이뤄진 만남은 비교적 화기애애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그 어느 때보다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둘 사이의 오랜 ‘악연’ 때문이었다.
이해찬 대표와 김종인 위원장의 첫 만남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3선을 노리던 김종인 민정당 의원은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앞서 두 차례 전국구(비례대표)로 배지를 달았던 김종인 위원장으로선 첫 번째 지역구 출마였던 셈이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의 손자였던 김 위원장은 노태우 정부 취임 준비위원을 맡는 등 정권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정치인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총재를 맡고 있던 평화민주당은 운동권 출신 이해찬을 김 위원장 저격수로 내보냈다. 이 대표는 민청학련 사건 구속, 서울대복학생협의회장 등 민주화운동 경력을 앞세우며 김 위원장과의 차별화를 노렸다. 동교동계 한 원로인사는 “DJ는 이 대표를 학생 시절부터 각별히 아꼈다”면서 “요새 말로 하면 금수저(김종인)와 흙수저(이해찬)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당시 관악을 지역은 여당 집권 세력 거물과 36세 청년 정치인 간 맞대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부분 김 위원장 승리를 점쳤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이 대표는 김 위원장을 불과 5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다. 그 후 이 대표는 관악을에서만 내리 5선을 하면서 민주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했다. 노무현 정부 땐 국무총리로 발탁되기도 했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김종인 위원장은 노태우 정부 때 보건사회부 장관과 경제수석을 거쳐 1992년 전국구로 3선 고지에 올랐다. 그 후 2004년(17대)과 2016년(20대)에도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비례대표로만 다섯 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 위원장이었지만 단 한 번의 지역구 패배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또 국회의원 시절을 빼고는 대부분 중앙 정치권과 인연이 없었다. 정가에선 김 위원장이 13대 총선에서 승리했다면 정치 역정이 달라졌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해찬 대표와 김종인 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김 위원장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는 동시에 비례대표 2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이 대표와는 정치적 무게감에서 차이가 컸다. 이 대표는 17대 총선에서 과반 이상을 차지한 집권당(열린우리당) 주류 친노의 핵심이었고, 노무현 정부 첫 국무총리였다.
2012년 김 위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로 새누리당(미래통합당 전신) 국민행복추진위원장으로 ‘컴백’해 선거 전면에 나섰을 때 이해찬 대표는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대표였다. 대선 정국에서 여당과 1야당의 총사령관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하지만 24년 만의 ‘리턴매치’는 불발됐다. 이해찬 대표가 ‘친노 패권주의’ 비판에 휩싸이며 2선으로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대선을 승리로 이끌며 선거 전략가로서 재평가를 받았다.
둘의 인연은 2016년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에 의해 이어졌다. 문재인 대표는 총선 승리를 위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김 위원장을 비대위 대표로 영입했다. 그리고 공천 전권을 줬다. 김 위원장은 ‘패권주의’를 청산하겠다며 친노 좌장 이해찬 대표를 공천에서 배제했다. 한 친노 전직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당선이 확실시됐던 이해찬의 컷오프를 두고 김종인의 사적 감정이 작용했다는 말이 파다했었다”라고 떠올렸다.
이해찬 대표는 김 위원장에게 반발하며 세종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승리했고, 당으로 복귀했다. 김 위원장은 이 대표의 복당에 적잖은 불만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 측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치권 인사는 “(김 위원장은) 이 대표 복당을 반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친노 세력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러 번 하소연했다”고 귀띔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2017년 3월 민주당을 떠났다. 돌아온 이 대표는 2018년 당 대표로 선출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김 위원장은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서 선거를 이끌었다. 이 대표는 민주당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직접 맞붙은 것은 아니었지만 양측의 전략가로서 일합을 겨뤘다. 이 대표는 1992년 조순 서울시장 캠프에서 전략을 맡은 이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다. 김 위원장은 당을 바꿔가며 2012년 대선과 2016년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국단위 선거에서 ‘수싸움’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두 사람이 21대 총선 길목에서 만난 것이다.
결과는 177석을 거둔 민주당의 대승. 김 위원장이 본격 뛰어든 시기가 총선 직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둘 사이의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는 평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으로서 1야당의 재건 및 2022년 대선 밑그림을 그릴 예정이다. 이 대표는 오는 8월로 임기가 끝나지만 여권 차기 구도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김태년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문 당권파의 좌장격인 이 대표 의중이 ‘포스트 문재인’ 주요 변수로 꼽히는 이유에서다.
정치권도 이 대표와 김 위원장의 ‘킹메이커’ 역할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30년 넘게 이어진 둘의 관계엔 현대 정치사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말을 꺼낸 뒤 “정치현실이나 나이 등을 고려하면 다음 대선이 둘의 마지막 승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 전략가로서 모든 것을 쏟아 붓지 않겠나. 이 대표나 김 위원장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둘의 개인 스타일이나 전략이 다음 대선에 어떻게 작용할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