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참은 영화 연출의 꿈 이뤄 “처음 시도하는 것인데 망신당하는 게 당연”
‘연기 인생 33년’ 베테랑 배우에서 새내기 감독으로 첫 메가폰을 잡은 정진영은 ‘사라진 시간’에 대해 “망신당할 각오를 하고 찍은 영화”라고 말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런 부분은 혹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연출하신 게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매번 똑같거나 비슷했다. “아뇨, 그냥 찍은 건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감독이 기자의 분석을 두고 신기해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촬영을 앞두고 눈에 보이고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그림들이 즉흥적으로 작품에 반영됐다는 게 정진영의 이야기다. 의도를 맞히기 위해 마치 문제풀이처럼 의식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관객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여지가 무한대인 셈이다.
#“처음 쓴 시나리오, 쓰자마자 그냥 버렸다”
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진영이 아닌 감독 정진영은 ‘사라진 시간’의 제작 의도에 대해 “망신당할 각오를 하고 만든 영화”라고 말했다. 1988년 연극 ‘대결’을 시작으로 연기 인생을 걸어온 지 33년, 그동안 그의 안에 갇혀 있던 ‘영화 제작의 혼’이 몇 년 전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원래는 독립영화 출연이 예정돼 있었는데 촬영 일주일을 앞두고 엎어졌어요. 참 허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이 현실이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저한테 한두 달 정도 스케줄이 비잖아요? 그 시간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처음에 쓴 시나리오는 쓰자마자 그냥 버렸어요. 저도 놀랐는데, 제 자신이 참 관습적이더라고요. 이제까지 나에겐 남들과 다른 감수성이나 취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안전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첫 시나리오를 버리고 ‘사라진 시간’을 쓴 거죠.”
정진영은 ‘사라진 시간’의 시놉시스를 쓰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조진웅을 떠올리며 캐릭터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어릴 때부터 연출을 해보고 싶었는데, 못 했죠 사실. 안 한 게 아니라(웃음). 배우 일을 쭉 하면서 제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연출을 한다는 거 자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망신당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도 있었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망신당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그걸 두려워하면 어떡하나, 망신당해도 좋다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갑자기 생각한 건 아니고, 문득 우리 애도 고3이 됐으니 이제 다 키운 게 아닌가 싶은 거예요. 가장으로서 나의 일이 다 끝나간 시점에서 ‘이제는 뭐가 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술은 도전이라잖아요. 그러니 망신당하더라도 도전을 한 번 해보자, 한 겁니다.”
#모든 게 낯설다, 배우 조진웅 빼고
정진영의 도전정신이 응축된 ‘사라진 시간’은 말 그대로 실험의 연속이다. 고정관념을 가진 채 관람했다간 물음표로 가득 찬 머리로 나올 수밖에 없다. 장르적인 문법도, 연출도 과감하게 제로베이스로 돌려버린 이 작품에서 그나마 관객들에게 익숙할 인물은 조진웅일 것이다. 극 중 조진웅은 시골마을에서 발생한 교사 부부 화재 사망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에서, 하루아침에 자신이 알던 삶의 모든 것이 뒤바뀐 ‘형구’ 역으로 분한다.
연극 무대 위의 사람들처럼 작위적인 대사로 연기하고 또 행동하는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조진웅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영화의 틀과 이미지를 이끌고 나간다. 그런데 조진웅과 다른 배우들의 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불협화음이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더욱 높인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조진웅이 누구보다 제일 먼저 이 작품의 초고를 접했고, 단 하루 만에 출연을 결심했다는 뒷이야기를 듣고 나면 작품이 또 한 번 새롭게 보일 것이다.
정진영의 영화 연출의 시작은 ‘망신당할 각오’에서 출발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때까지만 해도 ‘정진영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암묵적인 비밀이었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완성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으려 하던 비밀이 공개된 것도, 그래서 이 영화가 완성된 데도 조진웅이 일조한 부분이 있었다는 게 정진영의 이야기다.
“진웅이가 ‘누가 제작해요?’ 해서 ‘내가 제작해, 영화사도 만들어서 사비로 2억 원 정도 들일 거야’ 그랬어요. 그러니까 진웅이가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 작품 만들면서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폐가 될 거 같아서 싫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대장 김창수’ 팀 배우들하고 같이 술자리가 있었는데 갑자기 진웅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정진영 선배님 영화 만든다고 합니다. 제가 거기 출연합니다’ 이러는 겁니다(웃음). 비밀이었는데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그렇게 해서 장 대표(장원석 BA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끌어들인 거예요. 장 대표도 한 번 보더니 ‘제작 해보겠다’ 해서 공동제작하게 된 거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영화사 안 만들었을 건데(웃음)”
영화 ‘사라진 시간’ 현장에서 정진영 감독.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준익 감독님 왈, ‘평은 보지 마라’”
오는 6월 18일 개봉을 앞두고 열렸던 ‘사라진 시간’ 시사회에서는 그간 ‘배우 정진영’에 익숙해 있던 영화계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정진영의 인터뷰에서 주로 언급된 이준익 감독은 조진웅에 이어 두 번째로 시나리오를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좋은 시나리오인데, 이걸로 영화 만들면 욕 많이 먹을 각오해. 그게 현실이니까, 그걸 감당할 각오가 있으면 해”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낯설다는 감정이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변하기까지는 분명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동안 ‘감독 정진영’은 주위의 말 하나하나에 휘둘려야 할지도 모른다. 정진영은 “그런 각오가 돼 있기에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사회 끝나고 나서 이준익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평은 보지 마라’(웃음). ‘나쁜 글을 보면 창자가 도려내지는 느낌이다, 내가 네 성격을 아는데 네가 그런 거 못 버틴다’. 그래서 안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사실 어젯밤에 제가 다 봤어요(웃음). 창자를 도려내더라도 이건 봐야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서툰 것에 대한 비판이야 어차피 각오한 거고, 서툰 사람이 만든 작품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죠. 다만 저는 투박하게 전달을 했고, 영화는 그냥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즐기고, 또 소화하셨으면 해요. 이제 저는 굉장히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테니 그만큼 관객 분들이 다양하게 즐기고 비판해주시고 그러셨으면 합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