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 봉하마을 사저 반대했지만 반영 안 돼…문 대통령 사저 터 옮긴 의중 궁금”
김두규 교수. 사진=EBS 캡처
6월 6일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경호처가 현재의 양산 매곡동 사저 인근에 경호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고 판단해 사저를 옮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위치한 2630㎡(약 797평) 규모의 대지를 10억 6401만 원에 샀다. 3.3㎡(약 1평)당 133만 원쯤이었다. 문 대통령은 새 사저 건물 규모를 현재 경남 양산시 매곡동 자택보다 크지 않게 만들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진 후 세간의 눈은 김두규 교수에게 쏠렸다. 그가 남긴 족적 때문이다. 김두규 교수가 유명세를 탄 건 2002년 2월 초였다. 당시 이회창, 이인제, 정몽준, 노무현 등 각 당 대통령 후보 출마자 생가와 선영을 두고 누가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지 예측이 오갔다.
지지율로는 이회창 후보가 선두였고 이인제 후보가 이를 추격하는 모양새였다. 노무현 후보는 대중의 관심 밖에 있었다. 노 후보 지지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월간지 ‘신동아’에 “풍수학적으로 보면 이회창 후보는 맥이 끊겼고 이인제 후보는 배신을 당할 운이다. 노무현 후보가 가장 좋다”고 썼다. 10개월 뒤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이 됐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그는 2004년 5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발탁됐다. 현재 세종시장인 이춘희 당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지원단장과의 인연도 이때 생겼다. 신행정수도 최초 후보지는 충남 공주시, 충남 장기·연기군, 충북 오송군, 충남 아산시, 대전 서남부 지역이었다.
김두규 교수가 가장 탁월한 입지라고 생각한 곳은 대전 남부 지역 금산 쪽이었다. 지리적으로 영남과 호남, 충북의 중심부에 섰고 남한 중심 지역이기에 지역 화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봤다. 수도권과 완전히 분리돼 독자적인 수도 기능도 가능했다. 금산은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곳으로 유명하고, 자연환경도 잘 보존된 도시다.
김 교수는 “대전 이남 금산에 신행정수도가 들어서면 통일 이전엔 지방분권을 목표로 하는 데 이상적이다. 통일 이후에는 서울, 평양, 금산이 각 지역의 중심지가 되는 삼경(三京)제도가 이뤄질 수 있어 남북한의 화합과 국토의 균형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안은 반영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평가위원이 현장을 샅샅이 답사한 뒤 평가했다면 좀 더 나은 후보지를 선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국가발전을 염두에 뒀을 땐 지역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행정수도 예정지로 충청을 점지했을 때 충남이든 충북이든 충청인은 모두 좋아 했으면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신행정수도가 충남과 충북 사이에 놓이게 됐다. 안타까웠다”고 했다. 충남발전연구원에서 주최한 심포지엄 때도 그는 “크게 봐야 한다. 대전 이남은 경상도에게도 좋고 전라도에게도 좋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풍수지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노무현 전 대통령 개인 스타일에서 이유를 찾기도 했다. 그는 “풍수지리를 대하는 데에서 개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면이 많다. 선산이 있는 집 출신이거나 장남은 보통 보수적이어서 풍수지리를 많이 본다. 하지만 차남 등 집안대소사에 큰 관여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풍수지리에 무관심한 편”이라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은 3남2녀의 막내였다.
세종시가 결정된 뒤 김두규 교수가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 쪽 연락을 받게 된 건 2006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 형 노건평 씨로부터였다. 둘의 인연은 2002년으로 돌아간다. 2002년 잠룡의 생가와 선영 방문 때 다른 후보들과 달리 노 전 대통령 쪽은 김 교수의 생가 및 선영 방문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를 안내한 사람이 노건평 씨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4년 만에 다시 연락을 해왔다. 퇴임하고 지낼 사저 터를 두고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김두규 교수는 2006년 6월 정상문 당시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비롯한 관계자 10여 명, 건축설계 담당자 정기용 씨 등과 함께 현장엘 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는 타인의 소유였고 바로 구매가 어려웠다. 노 전 대통령 쪽은 생가 뒤 단감나무 밭을 사저 부지로 계획하고 있었다.
김두규 교수는 반대 의견을 냈다. 일단 주인 잃은 무덤이 있는 곳이라서 집터로서 부적합했다. 또한 시야에 들어오는 봉화산 쪽 바위가 지나치게 강해 보였다고 한다. 사저 예정지 바로 옆인 봉화산 쪽으로 냇물이 흘렀는데, 이는 골바람이 분다는 뜻이다. 방위상 북동쪽으로 풍수에서는 ‘황천살’이라 하여 꺼린다.
황천살은 집터든 산소터든 모두 왼쪽 방향이라 바람의 살기와 물의 살기가 들어오는 경우를 말한다. 청와대 경호실 담당자는 황천살이 낀다는 김 교수의 말에 “이곳은 경호상에도 문제가 있다”고 거들었다. 김 교수는 “집 뒤로 이사 가지 않는다”는 속설도 마음에 걸렸다.
김 교수는 정기용 씨에게 이와 같은 의견을 전했다. 정 씨는 “대통령께 사저 건축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김 교수님의 이야기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김 교수는 청와대 행정관에게도 풍수 의견을 써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풍수지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노건평 씨는 얼마 뒤 김 교수에게 “대통령이 봉화산 바위가 보이는 곳에 거실과 안방이 있는 사저를 짓기를 원한다. 원안대로 생가 뒤밖에 대안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3년 뒤인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김 교수는 노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대통령도 풍수지리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김 교수는 “실향민은 고향 땅에 대한 애착이 좀 적은 편”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 부모는 북한에서 살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한국으로 와 경남 거제에 정착했다.
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 사저 이동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새 사저 터를 다녀왔다고 한다. 김 교수는 말을 아꼈다. 그에게 땅이란 영화에서처럼 한 번 보고 딱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명에서부터 주변 산세, 환경, 이제까지 거쳐 간 인물, 마을 분위기 등을 하나씩 보고 곱씹어야 의미가 나온다.
김 교수는 “일단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보통 답사를 다녀와서 눈으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화해 복기를 한다. ‘왜 저렇게 잡았을까? 어떤 의도였을까?’ 고민한다. 한 번만 보면 의도가 바로 안 보인다. 마을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나오는 게 진짜 땅 이야기다. 정답이 안 나와서 계속 보고 있다. 다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김 교수는 “사저를 옮길 예정이란 소식을 듣자마자 크게 놀랐다. 퇴임 뒤 매곡마을로 향할 줄 알았다. 당황스러웠다. 문재인 대통령 의중이 궁금하다. 그게 파악이 돼야 숨은 의도가 나올 것 같다. 왜 지산리로 갔는지 고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사저가 있는 매곡마을을 과거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매곡마을에 대해 김 교수는 “바위 아래 무덤이 있고 무덤 아래 절이 있다. 절 아래 무덤이 있고 무덤 아래 바위가 있다. 그 100m 아래 대통령 사저가 있다. 바위가 사저를 받쳐주고 있다. 바위를 매개로 음택인 무덤과 양택인 절이 동거한다. 무덤 터가 되기엔 무겁고 절이 자리하기에는 가볍고 집터로는 비장하다”고 했다. 이어지는 김 교수 설명이다.
“풍수에서 바위는 양날의 칼로 해석된다. 사람을 죽이는 나쁜 돌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좋은 바위도 있다. 바위는 권력의 기운을 주관한다. 매곡마을 사저는 끊어진 터인 절처(絶處)였지만 그곳엔 바위가 있었다. 바위가 권력 의지를 살리는 모양새(逢生)였다. 이른바 절처봉생(絶處逢生)의 땅이었다. 절처봉생은 ‘길인은 하늘이 도우니 절처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길인천상(吉人天相)을 전제한다.”
한편, 김 교수는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과도 종종 연락을 나눈다고 전했다. 둘 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고 독일 뮌스터대 출신 박사지만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나 어릴 땐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둘은 15년 전쯤 상갓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김 위원장 조부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 풍수지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인연 덕에 둘은 가까워졌다. 이후 자연스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묻는 인연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김 교수는 “김 위원장은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정이 없는 듯하며 다정한 사람이다. 얼마 전에도 대치동에서 만나 저녁 먹으며 옛날 얘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