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감독의 ‘행복한 눈빛’ 갖고 싶어”…촬영 마친 후 그도 자신의 단편영화 제작
“일단 이 영화는 그냥 연기를 해 봐야 알 것 같아서, 그래서 하겠다고 한 겁니다.”
배우 조진웅은 ‘사라진 시간’ 출연을 수락하는 과정에서 송로주가 한몫했다고 말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영화도 참 송로주 같은 매력이 있죠(웃음). 배우를 막 홀려요. 시나리오만 보고도 이걸로 한 번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출연을 수락하려고 한남동에 있는 정진영 감독님 사무실에 갔는데 갑자기 송로주를 막 꺼내요. 오후 4시도 안 됐는데 ‘야, 마시자’ 하면서. 그래서 안주로 파전 하나 시켜서 둘이서 2병을 비웠는데 문득 잠들었다가 딱 깨니까 분당 어디래요. 감독님 댁인 거야. 한남동에서 갑자기 분당까지 왔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래서 일단 대충 술을 깨고 다시 헤어졌는데 이번에는 또 대학로에 또 다른 선배 집이에요. 한남동 갔다가 분당 갔다가 대학로 갔다가 그러는데 내 머릿속에 기억은 하나도 없고… 참 묘한 날인 거죠. ‘사라진 시간’하고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웃음).”
#묘한 기억, 기묘한 영화
영화 ‘사라진 시간’ 속 조진웅은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발생한 외지인 부부 방화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중 어느 하루를 기점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형사 ‘형구’ 역을 맡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존재와 추억들이 모두 왜곡돼 있고, 주변인들은 마치 내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대하고 있다. 그 안에서 진실을 찾을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뒤바뀐 환경에 순응할 것인지를 놓고 관객들은 형구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정확한 기승전결과 꽉 짜인 플롯 그리고 완전히 닫힌 결말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의 여지가 풍부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노다지’처럼 다가올 것이다. 배우 역시 후자의 관객들에게 영화를 추천한다고 강조했다.
꽉 짜인 플롯을 따라가는 상업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사라진 시간’의 스토리텔링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조진웅은 이에 대해 관객들의 다양한 감상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영화 자체에 대한 흥미도 있었겠지만, 조진웅의 선택을 놓고 정진영 감독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어 보였다. 작품과 별개로 조진웅은 정진영의 ‘아이처럼 행복해 보이는 눈빛’에 반했다고 했다.
“저는 정진영 감독님이 연기하실 때 그 눈빛을 너무 좋아해요. 참 아이 같은 눈이거든요.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눈은 잘 찾아볼 수 없어요. 사실 배우를 직업으로 한다는 게 마냥 신나고 즐거운 게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할 때 배우는 진짜로 단명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중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수명이 짧아져요(웃음). 일반적인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노력하는데 배우들은 그걸 재생산하고, 재현해내야 하고 그렇잖아요? 보시기엔 ‘연기 좋네’ 하실 수 있겠지만 접근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정진영 감독님은 현장에서도 정말 햇살 같은 배우였는데, 이번에 시나리오를 받고 만나 뵈러 가서 또 보니까 그 눈이 진짜 아이처럼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나도 저런 눈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를 찍고 편집하면서도 너무 행복해 하시고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부럽기도 하고,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게 좋기도 하고 그랬죠.”
조진웅은 ‘사라진 시간’ 촬영 후 단편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작품 공개 여부는 현재 조율 중이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진웅’ 이름 석 자가 관객들에게 주는 오해에 대해서도 약간의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굵직한 상업영화로 대중에게 익숙한 그가 실험적인 작품의 단독 주연으로 나선다는 것은 대중이 기존에 인지하고 있는 조진웅에 대한 이미지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다.
“그런 오해에서 오는 배신감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죠. 난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웃음).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애프터서비스, 보상이 확실히 있을 거란 생각을 해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장르나 해석을 완전하게 구분 짓는 영화는 물론 안전할 수 있겠죠. 손익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구조가 보통 이런 부류거든요. 하지만 저는 ‘사라진 시간’ 같은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이 영화를 바라보는 인식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슬로 푸드 같은 영화가 간혹 필요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런 영화는 또 GV(Guest Visit·관객을 모아놓고 영화 관계자들이 직접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질의응답을 받는 이벤트)를 하면 재밌거든요. 관객 분들이 연출의 의도를 굉장히 궁금해 하실 것 같은데 코로나19 때문에 너무 안타깝죠. 실은 별의 별 생각을 다 해 봤어요, 온라인 GV 같은 것도(웃음).”
그가 가진 애정만큼이나 ‘사라진 시간’은 배우 조진웅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겼다. 최근 제작한 단편영화 역시 ‘사라진 시간’ 촬영을 마치고 나서 시작하게 됐다고. “정진영 감독님처럼 행복한 눈을 가지고 싶었다. 내 인생의 롤 모델처럼, 내 작품을 레퍼런스처럼 가지고 싶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너무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찍는 건 단편영환데 현장은 상업영화 부럽지 않았어요(웃음). 그 과정에서 이제야 정진영 감독님이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알겠다 싶더라고요. 그분이 하루에 3시간 주무시면서도 영화를 만드는 게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고 그랬거든요. 저도 그 행보를 같이 한다는 게 참 기분 좋은 일이었고…. 그런데 감독님이 차기작 찍으신다고 하시면 그땐 안 해요(웃음). 제가 한 번 해 드렸으니까 이번엔 감독님이 제 것 해주시겠죠(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