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양구, 파로호 화천, 자작숲 인제, 서핑 고성…‘지뢰 표식지가 포토존’ 달라지는 접경지 여행
한 공무원은 DMZ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 DMZ와 직접 맞대고 있는 강원도의 접경지역들은 하나같이 DMZ의 긴장감 대신 보존된 자연과 생태를 바탕으로 평화지역으로 거듭나자고 말한다. “전방에서도 삶은 흐른다”는 어느 군인의 말처럼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자연이 있었다.
DMZ 및 접경도시 관광이 최근 달라지고 있다. 양구 민통선 내 ‘펀치볼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DMZ 생태여행을 체험해봤다. 사진=이송이 기자
#사람 발길 끊기자 천혜의 보고 된 DMZ에 순례길 조성
김창환 강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는 “비무장지대라는 의미에서의 DMZ(DeMilitarized Zone)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세계에 17개가 있지만 냉전과 타의에 의해 생긴 DMZ는 전 세계에 단 하나, 한국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남북관계가 좋든 안 좋든 DMZ는 영원한 것이다. 남북분단이라는 의미에서의 비무장지대는 결국 없어져야 하겠지만 생태와 환경적 입장에서의 DMZ는 영원해야 한다”며 “위험한 DMZ가 아니라 건강한 DMZ를 만들자”고 말했다. 이제는 DMZ를 철책이나 전쟁의 상흔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생태환경 관광지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70여 년간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스럽게 독특한 생태계를 조성하게 된 DMZ는 철책이나 지뢰라는 단어와 함께 생태와 환경이라는 상반된 단어가 공존하는 곳이다.
김승호 DMZ 생태연구소 소장 역시 “한국전쟁 당시 초토화됐던 DMZ 지역이 지금은 자연의 힘으로 복원된 완벽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자연환경을 간직한 천혜의 보고다. 인간의 발길이 끊긴 DMZ에는 다양한 동식물과 조류, 곤충, 물고기 등이 서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임진강부터 동해까지 이어져 있는 군사분계선과 DMZ의 길이는 248km나 된다. 그리고 그 곁에는 경기도에서 강원도까지 9개의 접경도시가 있다. 경기권에 강화 김포 파주 연천, 강원권에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이 있다. 행정안전부는 2022년까지 강화~고성 비무장지대에 286억 원을 투입해 총 456km의 ‘DMZ 통일을 여는 길’을 조성해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한국의 DMZ 순례길 조성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한국전쟁 당시 초토화됐던 DMZ 지역은 70여 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자연의 힘으로 생태계가 복원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자연환경을 간직한 천혜의 보고가 됐다. 사진=이송이 기자
행안부는 또 ‘접경지역 발전종합계획’을 수립하고 민간자본과 국비, 지방비를 더해 2030년까지 약 13조 원을 투자해 21개의 남북 교류협력 기반 조성 사업과 42개의 생활환경 및 정주여건 개선 사업을 비롯해 108개의 생태·평화 관광 활성화 사업을 꾸려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DMZ 관광은 사실 최근까지 별다른 진척 없이 낙후한 상황이었다. 주로 북한에 고향을 두거나 관련이 있는 장·노년층이나 외국인이 주 대상이었고 국내 젊은 층은 DMZ 관광에서 배제돼 있었다”며 “외국인을 보내도 만족도가 떨어졌다. 처음엔 한국에 오면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인식하던 외국인들도 막상 갔다 오면 실망하기 일쑤였다”고 전했다.
세밀한 프로그램 없이 관련 유적지만 ‘찍고 찍고’ 다니는 관광이었던 데다 외국어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DMZ 인접 땅굴이나 전망대에 가도 안내판에 적혀진 다 지워져가는 영어설명 외에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자연·생태·액티비티 관광으로
하지만 DMZ와 접경도시 관광이 최근 달라지고 있다. 민통선 내 ‘펀치볼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생태여행을 표방하는 양구, 평화의 댐과 함께 파로호 호수여행을 제안하는 화천, 이국적인 자작나무 숲 산책을 권하는 인제, 서핑성지가 된 고성 등 접경지역 관광에도 세대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산림청은 지자체와 함께 양구 해안면 일대 펀치볼 지형을 둘러 ‘펀치볼둘레길’을 만들었다. 민통선 내에 있어 휴전 후 인위적 힘이 가해지지 않아 희귀생물과 천연 숲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사진=이송이 기자
DMZ 생태관광을 본격화하고 있는 양구에 가봤다.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와 독도까지 포함하면 지리학적으로 양구가 대한민국의 정중앙이 된다고 한다. 이는 외국인에게도 자연스레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식시켜 준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양구는 한반도 정중앙이라는 수식 외에도 ‘펀치볼 양구’라는 의외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미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이다. 높은 산에 둘러싸여 움푹 패인 분지 지형이 칵테일 ‘펀치’ 잔, 우리말로 하면 화채그릇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지금은 양구를 대표하는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산림청은 지자체와 함께 펀치볼 지형을 둘러 ‘펀치볼둘레길’을 만들었다. 양구 해안면 일대의 펀치볼둘레길은 민통선 내에 있다. 휴전 후 인위적 힘이 가해지지 않아 희귀생물과 천연 숲 보존이 잘 되어 있어 산림청이 인정한 명품 숲이기도 하다. 탐방로는 총 73.22㎞, 4개 코스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숲길이 많아 시원하고 전망대에서 펀치볼 지형을 볼 수 있는 ‘오유밭길’을 걸어봤다.
숲길의 고즈넉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깜짝 놀랄 만큼 ‘지뢰주의’ 표식이 많다. 11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펀치볼은 곳곳에 붙은 ‘지뢰’라는 표식이 무색하게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한다. 지뢰 표식을 결코 우습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움푹 페인 분지지대가 주는 특유의 아늑함이 포근히 안긴 기분을 느끼게 한다. 민통선 안쪽이라는 사실마저 그만 잊게 한다. 탐방객들은 오히려 이 ‘지뢰’ 표시를 포토스폿으로 여긴다. 하지만 철조망 안으로는 여전히 지뢰지대가 많아 반드시 미리 탐방 예약을 하고 정해진 트레일 안에서 숲길등산지도사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야 한다.
펀치볼둘레길에는 숲길의 고즈넉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깜짝 놀랄 만큼 ‘지뢰주의’ 표식이 많다. 하지만 해발 11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덕에 곳곳에 붙은 ‘지뢰’라는 표식이 무색하게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한다. 탐방객들은 오히려 이 ‘지뢰’ 표시를 포토스폿으로 여긴다. 사진=김선권 여행작가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펀치볼 전망대에서는 북한 땅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을지전망대와 제4땅굴 등이 보인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라 눈을 돌리니 금강산 끄트머리 봉우리까지도 희미하게 보였다. 민통선 안 펀치볼둘레길 트레킹의 맛은 달콤쌉싸름하다. 야생이 빚어놓은 자연 속에서 달콤함을 느끼면서도 접근할 수 없는 지뢰밭과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낀다.
70여 년 동안 DMZ에서 사라져간 마을의 숫자는 427개라고 보고되고 있다. 펀치볼둘레길 안내를 맡은 박진용 숲길등산지도사는 펀치볼둘레길 안쪽에 자리한 해안면 일대의 마을들을 바라보며 “1960년대에 정부가 민통선 안쪽에 500가구 1500여 명의 주민을 이주시키며 땅과 집을 줬다. 북한과 워낙 가까우니 남한의 생활상을 북한 군인에게 보여주며 회유하기 위해 집 문을 모두 북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래서 북한이 지척에 보이는 이곳 민통선 안쪽 집들은 모두 북향”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곳으로 이주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주민들과 그 자손들이 여전히 펀치볼 안쪽의 농토를 일구며 살고 있다.
그리고 여행자들은 민통선 내 마을인 해안면 마을들을 빙 둘러 산자락에 조성된 펀치볼둘레길을 걷는다. 후방과는 생태계가 다르고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아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숲이라서 해설사도 설명할 거리가 많았다. 양구 해안면에는 국립수목원이기도 한 DMZ자생식물원과 DMZ야생동물생태관이 있어 DMZ생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