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어진 무대 속 종횡무진 ‘좀비 매드맥스’ 카레이싱 백미, 더 길고 잦아진 신파는 아쉬워
사진=영화 ‘반도’ 스틸컷
‘부산행’ 좀비 사태 이후 4년, 국가적 기능을 상실한 남한을 배경으로 하는 ‘반도’는 좀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장단점을 그대로 안은 채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무법지대 속 다양한 인간군상의 생존 방식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결말까지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고, 바로 그 스토리 속에서 발생하는 선과 악의 대비가 지루하리만치 뚜렷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다. 지옥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린 미치광이 생존자들과 그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또 다른 생존자들의 갈등은 이 장르의 단골 소재인만큼, 어지간한 차별화를 두지 않으면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반도’의 악역들에게는 눈길이 쏠린다. 자신의 그룹이 아닌 생존자들을 이른바 ‘숨바꼭질’이라는 데스매치 게임에 집어넣고 도박을 거는 631부대의 모습이나 그 부대의 표면적 또는 실질적 지휘를 맡고 있는 황 중사(김민재 분)와 서 대위(구교환 분)의 경우다. 두 가지 악을 다른 결로 표현해 내면서도 연상호 감독은 이들에게 어떤 배경도 주지 않은 채 이야기 속으로 집어놓고 또 꺼내드는 능수능란함을 보여준다. 극악무도한 악역에게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서사를 안겨줌으로써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대의 많은 제작자들이 배워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진=영화 ‘반도’ 스틸컷
이처럼 악역들이 서사 없이도 존재감을 뽐내는 것과 비교해 주인공 정석(강동원 분) 일당의 빛은 다소 희미해 보인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앞서 ‘부산행’에서 일부 관객과 평론가 사이에서 비판을 받았던 신파적 요소를 ‘반도’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켜 도리어 주인공 측에 마련된 서사를 얄팍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 탓이다. 후반부에 갑자기 튀어나왔던 ‘부산행’의 신파와 굳이 다른 점을 하나 찾자면, ‘반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튜브 중간광고처럼 이런 감성을 흩뿌려 놔 관객을 감정 과잉 상태로 끌어들인다는 것.
감독으로서는 비판에 대한 정면 돌파일 수 있는 시도지만, 관객의 입장으로서는 변화나 발전이 아닌 고집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해외에서는 가족애 부분에 호응도가 높았던 만큼 해외 K 좀비 팬들을 겨냥했다면 성공적인 도박일 수도 있겠다.
만일 신파에 대해 걱정하는 관객들이 있다면 캐릭터의 면면이나 그 구성에 집중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남아있는 ‘선한 생존자’ 무리 가운데 무려 3명을 여성 배우들이 맡은 것에도 눈길이 모이지만, 이들 가운데 2명은 10대와 더 어린 소녀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위기 상황에 몰린 정석을 신들린 레이싱 능력으로 구해내는 천재 드라이버 준이(이레 분)와, 언니가 곤경에 처하면 “내가 또 나서야 하나”라며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는 여동생 유진(이예원 분)은 지옥 같은 ‘반도’를 바라보며 잔뜩 곤두서 있는 관객들의 신경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윤활제 같은 역할을 한다.
사진=영화 ‘반도’ 스틸컷
무리의 리더 격인 민정(이정현 분)이 이 ‘두 딸들’과 함께 만들어낸 한국판 매드맥스도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다. 20여 분간 이어지는 폐허 속 카 체이싱 신은 단순히 좀비의 머리를 날릴 때보다 더 강렬한 아드레날린을 관객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전작 ‘부산행’이 좁은 공간 속 끊임없이 몰아치는 좀비들의 공포에 중점을 뒀다면, ‘반도’는 넓은 공간에 힘 빠진 좀비들을 몰아넣어 좀비물로서의 공포감은 줄이되 결이 다른 액션으로 공백을 채워 넣은 셈이다.
이런 이유로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K 좀비로 풀어낸 신선한 매력은 전작에 비해 다소 가려진 점이 있다. 그러나 보호 받는 역할에 머물렀던 여성 또는 소녀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의 역전화나 막장으로 치닫는 세계 속 무너져가는 인간성에 대해 일말의 변명거리 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서사 구축은 클래식한 좀비물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겐 오히려 더욱 신선하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보통사람’에 충실한 서사를 보여준 주인공 정석 역시 장르물을 대표하는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완벽한 히어로가 아닌 ‘시시한 인간’ 또는 보편적인 욕망만으로 움직이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기에 이번에는 꽃잎도, 후광도, 사제복도 없다. 그러나 강동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은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한편 영화 ‘반도’는 ‘부산행’ 이후 국가적 능력을 상실한 남한을 배경으로 생존과 탈출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폐허 속에 남겨진 돈을 찾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반도로 돌아온 정석(강동원 분)과 그곳에서 들개처럼 살아남은 민정(이정현 분)의 가족, 그리고 들개 사냥꾼을 자처하며 좀비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돼 버린 미쳐버린 자들까지. 오직 생존만을 위해 짓밟거나 짓밟히는 이들의 이야기가 연상호 감독이 만들어낸 ‘K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풀려 나간다. ‘부산행’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졌지만, 단독 콘텐츠로서 풍성해진 즐길 거리에 주목. 115분, 15세 이상 관람가. 15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