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함께라면 뭔들 못하리~
▲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직장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야근 시간은 늘고 수당은 줄었다. 그만큼 힘들어진 셈이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야근마저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최근 한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30대 ‘골드미스’의 글이 화제가 됐다. 알아주는 직장에 모아놓은 돈도 있고 외모도 빠지는 않는 그녀가 피자 배달원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연이었다. 이 연애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야근이다. 야근을 하면서 우연히 피자를 시켜 먹었고 그때 처음 보고 호감을 느낀 후 줄기차게 피자를 시키면서 사랑을 키웠다는 스토리였다. 이 골드미스처럼 직장생활 8년차에 나름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E 씨(여·34)도 야근이 일종의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신입사원 교육을 맡고 있을 때예요. 한 남자 신입이 처음부터 눈에 띄긴 했는데 워낙 싹싹하게 일도 잘하고 해서 예뻐 보인다 싶었죠. 그런데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예요. 마음이 커져가니 일도 손에 잘 안 잡히더군요. 몇 개월을 고민하다가 일을 저질렀어요. 어느 날 야근을 하는데 마침 둘만 남은 상황이었죠. 둘이 듣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연결을 해서 사랑을 고백했어요. 조용한 야근 타임이라 용기를 낸 거죠.”
E 씨는 놀란 신입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신입 직원에게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 그는 “알면서도 용기를 냈다”며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속이 시원해서 후회도 없고 오히려 깔끔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여직원 때문에 야근을 자청하는 남자도 있다. 물류회사에서 일하는 S 씨(30)의 경우다.
“같은 사무실에 좋아하는 여직원이 있어요. 화려한 스타일은 아닌데 조용하고 상냥한 모습에 끌렸죠. 그 직원을 보러 간다는 생각 때문에 ‘지옥철’을 타는 출근길도 늘 즐거웠습니다. 영업 쪽이라 외근이 많아서 굳이 야근을 할 필요가 없던 날도 다시 사무실에 들어와서 업무량이 많은 그녀와 함께 야근을 했습니다. 늦은 시간에 한가한 지하철에 같이 앉아 퇴근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죠. 매일 야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 아직 고백도 못했는데 만약 고백을 하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합니다.”
이런 S 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그녀를 위해 야근까지 불사했던 그가 이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 그는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고백을 해야 할 텐데 지금으로선 더 좋은 회사를 가는 것도 마냥 즐겁지가 않다”며 “퇴사 전에 야근이라도 실컷 해서 기회를 만들어야 겠다”고 말했다. 야근을 하면서 ‘스릴’을 맛본 직장인들도 있다. 식품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Y 씨(32·여)의 유쾌한 야근의 추억이다.
“종종 야근을 하는 편이었는데 퇴근은 늦어지지만 같이 일하는 분들이랑 사이가 돈독하고 다들 성격이 활발해서 많이 힘들지는 않아요. 한번은 부장님이 먼저 퇴근하고 저희 부서 네 명만 남았는데 집중해서 일하다 보니 휴식이 필요했죠. 그때 과장님이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책상에서 화투를 꺼내시는 거예요. 지방에 워크숍 갔을 때 사둔 거라면서. 우리는 늦은 저녁 회의실에서 무릎담요를 깔고 연신 ‘못 먹어도 고우~!’를 외쳤답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L 씨(30)도 유쾌하지만 다소 스릴 있었던 야근 경험담이 있다. 신입 시절 시기가 시기인지라 일이 없어도 동기들과 야근을 밥 먹듯 했다고.
“그때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매사에 좀 어리바리하잖아요. 뭐는 되고 뭐는 안 되는지 감을 못 잡는 때죠. 하루는 야근을 하는데 지하 회사 식당까지 가기도 너무 귀찮고 밍밍한 밥을 먹기도 싫더라고요. 그래서 동기 셋이랑 같이 중식을 시켜먹기로 했어요.
이것저것 시켜서 막 입에 집어넣고 있는데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경비직원이 ‘배달음식 반입금지’라면서 난리를 치는 겁니다. 전혀 몰랐거든요. 한참을 야단맞느라 밥은 밥대로 못 먹고 서럽더라고요. 나중에 오기가 생겨서 피자 족발 등 배달음식 몇 번 더 시켜먹었습니다. 당시에는 중식만 금지였는데 지금은 모든 배달 음식이 금지가 돼버렸네요.”
아찔한 야근 경험담도 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K 씨(여·32)는 야근을 하다 건강에 이상신호를 느꼈다.
“원고를 체크하다 보면 야근할 때가 종종 있죠. 그런데 지금은 야근 거의 안 해요. 크게 덴 적이 있거든요. 한번은 야근을 하는데 갑자기 컴퓨터 모니터에 있는 글씨가 안 보이고 심장이 이상한 거예요. 급하게 병원을 찾았죠. 의사 말이 심장이 약한 사람한테 나타나는 증상이라더군요. ‘야근금지’를 처방받았습니다. 그 뒤로는 야근만 하면 토할 것 같은 증세가 나타나서 지금은 제 스스로도 야근을 꺼리고 상사도 야근을 안 시켜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지금에 와서는 잘 모르겠네요.”
J 씨(33)에겐 ‘피 빨리는’ 하룻밤의 야근이 있었다. 야근을 넘어 철야에 가까웠던 날 일어난 일이다.
“화학제품 관련 기업이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제품 테스트 때문에 밤을 샐 때가 있어요. 1시간마다 한 번씩 테스트를 해줘야 하죠. 지속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잠깐 졸다가 체크하는 그런 거였죠. 회사가 지방 외진 곳에 있는데 그날은 날도 덥고 해서 창문을 열고 테스트를 했어요. 다음날 몸을 보고 기절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모기 물린 자국이 뻘겋게 올라왔더라고요. 테스트 할 때도 윙윙거리긴 했지만 손으로 치워가며 했는데 잠깐씩 졸 때 물린 거죠. 가뜩이나 피부도 민감한데 한 번 긁기 시작했더니 덧나서 한 달간 잠을 설쳤네요.”
이렇게 야근의 추억을 가진 직장인들이 적지 않지만 야근이 추억이 아닌 일상이 된 직장인들은 더 많다. 토목 설계 회사에 근무하는 C 씨(33)는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 취업 이래 ‘야근 없는 인생’은 거의 꿈꿔보지 못했다고. 그는 “막상 취업하고 보니 주변에 왜 이리 ‘탈 토목’한 선배들이 많은지 알겠더라”면서 “야근이 그냥 업무시간이 된 지 오래”라고 하소연했다.
“연봉을 많이 주는 곳보다 야근 안하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들다”는 어느 네티즌의 뼈있는 한마디가 대다수 직장인들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