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라든 아버지 두고 볼 수 없다’
▲ 시민단체들의 박정희기념관 졸속 추진 반대 시위 모습. 사진제공=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
지난 4월 15일 시민단체 대표와 박정희 대통령 유족 측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박정희기념·도서관 공사금지가처분신청’ 소송을 냈다. 이번 소송에는 박지만 EG그룹 회장은 물론 그의 사촌형님과 큰누나, 조카 등 일가친척까지 대거 합류해 눈길을 끌고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공사를 둘러싸고 잡음이 일고 있는 내막을 파헤쳐봤다.
이번에 (사)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를 상대로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사람은 총 93명이다. 사업의 본 명칭은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건립사업(기념관사업)’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회의 회장은 9년 3개월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장수 비서실장으로 근무한 김정렴 씨가 맡고 있다.
소장에 따르면 기념관 건립부지는 마포구 상암동 403-2번지(361㎡), 403-3번지(340㎡), 403-9번지(153㎡) 일대(지상 3층 건물)다. 709억 원의 건립비용은 국고보조금 208억 원과 국민 기부금 500억 원으로 충당하게 되어있다.
모금 현황을 살펴보면 전경련(50억 원)과 무역협회(10억 원), 대한상의(10억 원) 등 재계에서 지원한 돈과 일반국민들의 성금을 합해 현재 총 170억 원 정도다.
기념관 건립은 시작부터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10년째 표류하고 있다. 1997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남권 득표를 염두에 두고 기념관 건립을 약속했고, 집권 뒤 국가보조금 200억여 원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정부는 기부금 부족을 이유로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지조성을 위한 터파기 단계에서 중단됐던 공사는 기념사업회 측이 행정소송을 제기해 승소함에 따라 올해 들어서야 가까스로 부지조성공사가 재개됐다. 하지만 기념사업회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불과 16% 정도의 공사가 추진된 상황에서 시민단체 및 유족 측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또다시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공사금지가처분 신청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신청인 중 한 명인 ‘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김동주 대표는 4월 27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대지조성이 완료되어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하면 국고보조금이 모두 사용되는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또 기부의사에 따른 기념관 사업 이행을 청구할 수 없게 되며 한 번 건립된 기념관을 다시 짓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의 주장과 입수한 소장을 토대로 공사반대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 ‘박정희기념관’이 아닌 ‘공공도서관’ 건립이 주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신청인들은 이에 대해 기념사업회 측이 원칙을 무시한 ‘밀실야합’을 벌인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념사업회 김정렴 회장이 있다고 성토하고 있다. 소장에 따르면 기념관 내 도서관과 기념관 비율은 각각 55%와 45%로 도서관 비율이 더 높다. 또 김 회장은 기념관 준공 즉시 소유권을 서울시에 기부·채납하고 기념사업회는 20년간 운영권만 갖기로 되어 있다. 신청인들은 “박 전 대통령 자료실로서의 도서관이 아니라 시립도서관 일부를 ‘박정희 기념관’으로 사용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고 반발하고 있다.
▲ 건축공사금지가처분신청서 사본. |
특히 기부채납 후 20년이 경과하면 서울시가 관리·운영권마저 갖게 되는데 서울시가 실적부진 등을 이유로 용도나 명칭 등을 변경하거나 아예 기념관을 폐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신청인들의 주장이다.
또 전시관의 규모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열악하다는 것도 유족 등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소장에 따르면 기념관 부지는 쓰레기 매립장 옆으로 조망권 확보조차 안되고 주차공간도 15대만 가능한 열악한 환경이다. 또 전체 건평 1591평 중 부대시설을 제외하면 박정희 대통령을 기념할 수 있는 전시실로 배당된 공간은 320평에 불과하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도 없고 학술회나 강연회, 행사 등을 할 공간조차 없다는 것이다.
특히 김 대표는 기념사업회 김정렴 회장에 대해 “‘박정희’라는 인물을 이용해 개인 영욕만 챙기려는 김 회장의 행태를 절대 좌시할 수 없다. 진정 박 전 대통령을 위한다면 유족과 국민들에게 사업내역을 투명하게 밝히고 모든 과정을 동의·합의하에 진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이 사업은 김 회장 독단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현재 유족을 비롯한 신청인들은 기념사업회 측이 국민의 동의없이 독단적으로 벌인 사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국민동의 없이 불투명하게 진행되고 있는 공사는 즉시 중단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신청인들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김정렴 회장의 해명을 듣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사업회 측으로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직접 연결이나 인터뷰는 불가능하다. 메모를 남기겠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기자는 재차 전화를 걸어 기념사업회 다른 관계자의 입장이라도 듣고자 요청했지만 기념사업회 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 답변할 사람도 없고 답변할 생각도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박지만 씨 측 정용희 비서실장 인터뷰
“ 박 회장 건의도 묵살…답답 ”
이번 공사중단가처분신청에는 박지만 EG 회장을 대신해 정용희 비서실장이 이름을 올렸다. 정 실장은 4월 2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념사업회 측의 졸속추진을 비판했다.
― 공사가처분신청까지 하게 된 이유는.
▲ 사업추진 과정에서의 부당함에 대해 그동안 사업회 측에 몇 차례나 건의하고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전혀 반응이나 개선할 움직임이 없었다. 오죽하면 작년에 박 회장이 김정렴 회장을 직접 만나 기념관 건립 전반에 대해 의견을 전달했겠나. 하지만 전혀 말이 안 통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던 차에 뜻이 맞는 시민단체와 일부 국민들이 기념회 측 사업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있어 동참하게 됐다.
― 기념사업회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박 회장은 뭐라 하나.
▲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진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기념관이 아니라 기념사업회 측에서 막무가내, 주먹구구식으로 벌이고 있는 졸속 추진이라며 굉장히 답답해하고 있다.
―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보나.
▲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귀한 성금으로 겉으로는 박정희기념관을 짓는 척해놓고 시에 도서관을 지어주는 형국이다. 국민들이 그런 목적으로 성금을 한 것이 아니지 않나. 본 목적인 박 전 대통령 기념관은 결국 도서관 한켠에 구차하게 세를 얻어 구색만 갖춰놓는 꼴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 사업회 측에 어떤 의견들을 전달했나.
▲ 사업추진 및 공사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박 회장은 부지선정부터 마음에 안들어 했다. 왜 하필 쓰레기매립장 옆이란 말인가. 굳이 그 열악하고 협소한 곳에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부터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김 회장에게 ‘아버지를 그런 곳에 모실 수는 없다’ ‘상암동 부지가 아니라도 찾아보면 많다’ ‘의견을 수렴해서 적당한 장소를 검토해보자’고 몇 차례나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