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만한 재벌회장 사정없는 꼬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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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혜화동 연극 홍보판에 재벌 풍자극 <리회장 시해사건> 포스터가 붙어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연극은 한 재벌기업 총수의 장례식과 사망 1주일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이 연극은 한국 재벌의 개인·사회적 욕망 뒤에 숨은 야합과 음모를 촌철살인의 풍자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지난 1997년 ‘세풍’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연극의 주연배우를 맡아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삼성그룹에서 이번 연극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그룹은 정보 라인을 동원해 이번 연극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는 후문이다. 이래저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연극 <리(LEE) 회장 시해사건>을 둘러싼 논란 속으로 들어가 봤다.
연극은 우리그룹 회장인 ‘리석희’의 빈소에서 시작된다. 1장의 장례식 장면에서 리 회장은 경제보국에 몸 바친 가업을 물려받아 우리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다고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2장에서부터 그려지는 리 회장의 실체는 한국사회에서 비판받는 부패한 재벌의 전형이다. 리 회장은 사돈 장 회장의 기업을 적대적 인수·합병(M&A)한다. 장 회장의 비서였던 진숙경은 리 회장의 자택비서로 근무하며 리 회장의 사랑을 받지만 실은 복수를 위해 이 집에 들어왔다.
리 회장은 분식회계로 장부를 조작해 조성한 비자금으로 뇌물을 뿌려 정·관계를 주무른다. 또한 탈세를 통해 경영권을 둘째 아들 리정현 상무에게 편법으로 승계한다. 리 회장은 정략적 차원에서 리 상무를 검찰 수뇌부의 딸과 결혼시키기도 한다. 리 회장은 선친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업 경영 원칙에 따라 노조는 아예 설립신고조차 못하게 차단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룹차원에서 관리해오던 정·관계 유력인사들의 로비명단인 ‘블루노트’가 폭로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무마된다. 우리그룹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리 회장은 경제부처·대검찰청 중앙수사부·청와대 차관급은 ‘쫄다구’로, 전직 관료는 ‘나부랭이’로 표현한다. 이들을 관리하는 것은 아들 몫이고 본인은 고상한 미술관을 관리한다. 그는 경제부처 국장들과 검찰 고관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행사를 후계자인 리 상무에게 맡기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런 쫄다구들 상대하게 됐냐?”
동생에게 경영권을 빼앗긴 큰아들은 변비가 심해 피똥을 싸는 리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변 제때 보시고요. 그동안 버신 거 세상에 다 돌려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님이 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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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모습. |
극중 우리그룹의 비자금 조성, 경영권 편법 승계 등은 지난 2008년 삼성그룹이 특검을 받기 전까지 꾸준히 논란이 돼왔던 부분이다. 우리그룹 정·관계 로비 명단인 ‘블루노트’도 노회찬 전 민주노동당 의원이 폭로했던 ‘삼성 X파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무노조 경영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연극 내에는 이처럼 삼성그룹을 연상시키는 연결 고리들이 적지 않다.
이 때문일까. 삼성 측에서는 이번 연극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재계 및 정보기관 관계자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삼성 측에서는 몇몇 비선 조직을 동원해 연극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 인사들이 연극의 의도가 뭔지, 실제로 삼성그룹과 연관된 내용이 많이 나왔는지를 확인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특히 삼성 측은 ‘세풍’ 사건의 주역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하필이면 연극의 주연을 맡은 부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세풍’ 사건은 지난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석희 전 차장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의 동생인 이회성 씨 등 관련자들이 23개 대기업으로부터 160억 원이 넘는 불법 정치자금을 모금해 한나라당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던 사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풍’ 사건에는 삼성그룹도 연루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회창 후보의 동생 회성 씨는 ‘세풍’ 사건 재판에서 “삼성 측으로부터 60억 원을 받아 당에 전달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지난 번 삼성특검으로 일단락된 몇몇 사안들이 연극의 소재가 되면서 다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삼성그룹 입장에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