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불 밑에서 뻥치고 등치고
▲ 용산구 국방부청사 |
천암함 침몰 사건으로 군 당국이 뒤숭숭한 분위기를 틈타 간 크게 국방부 고위층을 사칭한 기발한 사기꾼들의 범행 속으로 들어가 봤다.
경찰에 따르면 허 씨 등은 국방부와 30~4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용산구 갈월동에 사무실 두 곳을 얻어 ‘아이리스컨트롤’ ‘신용산건설’이라는 유령회사를 설립했다. 국방부 산하 공기업으로 위장한 이들은 건설·조경·식품·인쇄·쇠고기육가공업체 등 군납을 원하는 총 28개의 영세업체들에게 접근해 과감한 사기행각을 시작했다.
허 씨 등은 지난 2월 김 아무개 씨(49)에게 “국방부 수입 쇠고기를 군에 납품하도록 해 주겠다”며 계약 보증금 명목으로 85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국방부 산하 공기업이라는 말에 피해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속아 넘어갔다. 다른 피해자들도 “군 관련 공사를 수주해주겠다” “부대 납품권을 주겠다” “군부대 식당운영권을 주겠다”는 일당의 말에 속아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의 돈을 건넸지만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돈만 날린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 허 씨 일당이 사용한 수법은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치밀했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군 내부사정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는 군 수사권이 쉽게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철저히 악용했다. 군 고위관계자만 알 수 있는 내부 고급정보를 취급하는 파워맨 행세를 했던 것. 특히 허 씨는 ‘국방부 제2차관 내정자’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선추위) 위원장’ 등의 직함을 사칭, 국방부 고위 관계자처럼 행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당이 언급한 선추위는 지난해 12월 발족한 조직으로 군수조달 및 국방예산과 관련된 개선안을 연구하는 국방부 산하 민간자문기구다. 하지만 군납 업무를 총괄하는 국방부 제2차관직 직위는 논의된 적은 있지만 실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허 씨 일당은 일부 업체들이 자신들을 의심하는 기미가 보이면 인터넷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군 동향들을 파악해 흘리고 국방부 조직도와 국방부 로고를 도용한 가짜 공문서를 배포하기도 했다. 또 기밀문서 파쇄기까지 설치해 놓는 등 주요 기밀업무를 담당하는 것처럼 꾸몄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허 씨 등은 회사로 찾아오는 업체관계자들을 속이기 위해 국방부 취직을 미끼로 직원들을 채용해 그럴싸한 회사로 꾸몄다. 일당의 말에 속아 유령업체에 취업한 사람은 S대와 K 대 등 명문대 대학원 졸업자를 포함해 160명이 넘었다. 차후에 국방부 7급 특채로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입사를 한 이들 중에는 50만 원에서 200만 원의 급여를 단 한 번만 받고도 수개월 동안 출근을 해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적은 급여를 받고 회사 내에서 특별한 업무를 담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무원 특채’라는 미끼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허 씨 등은 또 “우리 회사에 투자하면 국방부 고위 공무원으로 채용해주겠다” “자녀들을 국방부 공무원으로 특채시켜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업체 관계자들을 현혹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일당이 2008년 2월부터 군납업자에게 뜯어낸 돈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무려 28억 원에 달했다. 피해자들은 “허 씨의 말을 들어보면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설마 국방부 청사 바로 옆에서 엄청난 사기행각을 벌일 줄 누가 알았겠나”라며 허탈함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전했다.
허 씨 등은 사기를 당한 사실을 인지한 일부 업자에게는 보증금을 돌려주고 합의해 고소를 취소시키는 수법으로 사건을 무마해오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