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서 ‘신의칙’ 인정받은 기업들 노심초사…기아차, 불법파견 사건도 남아 ‘촉각’
이번 대법원 판단에 대해서는 기아차가 정권 기조를 고려해 적극적으로 다투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사건 주심이었던 김선수 대법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해석인데, 그 이유와 파장을 취재했다.
기아차 노조 3500여 명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단은 이변이 없었다. 대법원은 기아차 노조 임금 청구 소송에 대해 원고 승소판결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노조가 2심에서 일부 승소한 뒤 강상호 기아자동차 노조지부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대법원, 노조 손 들어줘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8월 20일 기아차 노조 3500여 명이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9년 동안 이어져 온, 기아차 통상임금 판단이 드디어 기아차 노조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처음 기아차 노조가 소를 제기한 것은 2011년. 기아차 노동자 2만 7000여 명은 정기상여금·일비·중식비 등 일부 항목도 통상임금으로 포함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연 700%의 정기상여금을 비롯한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수당과 퇴직금 등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심 재판부는 기아차 측이 근로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포함한 총 4224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이 가운데 중식비, 가족수당 등은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고, 나머지는 통상임금에 포함해 4223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8월 20일, 대법원은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가아차가 소극적이었다?
1심부터 기아차 노조가 승소하면서 ‘원심 확정’으로 이미 예측이 기울었던 사건이다. 기아차 측은 1심부터 회사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상여금 지급 의무를 제한할 수 있기에, 상여금은 비정기적 보너스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강조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기아차가 추산한 미지급 법정수당의 규모에 따르더라도 당기순이익, 매출액, 동원 가능한 자금의 규모 등에 비춰볼 때 회사의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고, 대법원 역시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기업 경영에 따른 위험을 사실상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며 기아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1월 경기도 평택항 친환경차 수출현장에서 박한우 기아차 대표이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 사진=청와대 제공
이번 사건 주심은 김선수 대법관. 민변 출신으로 현재 대법관들 가운데 가장 친노동계로 꼽히는 그에게 사건이 배당됐을 때 ‘기피’ 카드가 가능했지만 사용하지 않은 기아차의 대응 전략을 놓고 “기아차가 소극적으로, 또 원칙적으로만 대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김선수 대법관을 피하고 싶었다면, 일부러 특정 로펌을 선임했으면 다른 주심을 만날 수 있었는데 기아차가 1심도, 2심도 패소한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친노동계 정책 방향을 감안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대법원은 2019년 대법관의 친인척이 소속된 법무법인이 맡은 사건에서 해당 대법관을 제외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대법관이 개정한 ‘대법원 사건의 배당에 관한 내규’에 따르면 대법관의 4촌 이내 친인척이 근무하는 법무법인이 수임한 사건에 대해 “해당 대법관에서 주심 배당을 하지 않는다”로 개정했다.
김선수 대법관 동생의 배우자가 김앤장에 근무하고 있어 기아차가 ‘김앤장’을 변호인단에 포함시켰으면, 조금 덜 불리한 ‘새로운 주심 대법관’을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 적지 않은 기업들이 노동사건으로 김앤장을 선택할 때 이를 고려한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하지만 기아차는 변호인단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택했고, 김선수 대법관은 노조 승소를 확정했다.
기아차와 가까운 한 법조인은 “기아차가 노조의 목소리를 고려하는 정부 기조를 감안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내부적으로도 통상임금 사건에 관심이 매우 많았지만 외부에는 이에 대해서 말을 아낀 것”이라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김선수 대법관과 계속되는 인연
사실 노동사건 전문인 김선수 대법관의 대기업 인식은 최근 공개변론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현대차와 노조 간 ‘조합원 산업재해 사망 시 직계가족 특별채용’ 사건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김선수 대법관은 기아차 등 대기업 세습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1985년 기아자동차에 입사해 벤젠에 노출된 상태로 일하다 현대자동차로 자리를 옮긴 A 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2010년 사망하자, A 씨 장녀는 노사 간 단체협약에 “조합원이 산업재해로 사망할 경우 결격 사유가 없는 직계 가족 1인을 6개월 이내 특별 채용한다”는 조항을 근거로 사측에 채용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단체협약 규정이 선량한 풍속이나 기타 사회상규를 위반했다(민법 103조)며 무효라고 주장했고 A 씨 자녀는 소송까지 냈지만 1심과 2심은 모두 ‘해당 규정이 사용자의 채용 자유를 제한하고 선량한 풍속에 위배돼 무효’라고 판결했다.
민변 출신으로 현재 대법관들 가운데 가장 친노동계 인사로 꼽히는 김선수 대법관에게 사건이 배당됐을 때 ‘기피’ 카드가 가능했지만 사용하지 않은 기아차의 대응 전략을 놓고 “기아차가 소극적으로, 또 원칙적으로만 대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사진=박은숙 기자
하지만 김선수 대법관은 해당 사건 공개변론에서 원심 판단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오히려 대기업 오너 일가 세습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그는 “대기업 오너 자녀로 태어났다는 사정으로 부와 경영권을 세습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신분에 의한 특혜 아니냐”고 지적했고, “기아차는 자산 총액이 55조 원에 달하는 대기업으로 사내변호사도 있고 법률고문도 받는데 충분한 검토를 거쳐 체결하고 사인한 단체협약을 무효라고 하느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공개변론 때 유일하게 두 차례 질의를 한 대법관 역시 김선수 대법관이었다.
#재계 “나 떨고 있니?”
자연스레 대법원의 임금 청구소송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기업들은 떨고 있다. 현재 통상임금 관련 대법원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금호타이어, 두산모트롤, 만도 등이다. 이들 기업 각 노조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미지급된 입금을 달라”며 기아차 노조와 똑같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2심에서 모두 사측이 승소했다. 신의칙을 2심 재판부들이 인정했다.
그동안 법원은 기업의 ‘당기순이익’을 비롯해 연간 매출액, 총인건비 등과 같은 지표로 신의칙 인정 여부를 판단했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금호타이어, 두산모트롤 등은 모두 1심에선 패소했지만 2심에서 ‘경영상 위기’를 적극적으로 어필해 승소했다. 하지만 이번에 기아차 사건에서는 신의칙을 더 엄격히 봐야 한다고 판단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기아차 역시 끝난 게 아니다. 경영진이 재판을 받고 있는 사안이 또 있다. 2019년 9월, 수원지검 공안부(김주필 부장검사)는 기아차 경영진이 불법 파견을 했다며 사내하청 근로자들이 고발한 사건에 대해 박한우 기아차 사장과 전 화성공장장, 경영진 2명을 불구속 기소했고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이들은 2015년 7월 파견 대상이 아닌 자동차 생산 업무 등 151개 공정에 사내협력사 16곳으로부터 근로자 860명을 불법파견 받은 혐의인데, 자동차 생산 업무의 경우 ‘직접생산공정’에 해당해 불법으로 판단했다. 다만 사내하청 근로자들의 고발대상이었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해서는 사내협력사 계약 등 업무에 관여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으로 기소에서 제외됐다.
당시 사건에 정통한 변호사는 “기아차 측에서 정몽구 회장이 기소되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 볼 정도로 많이 긴장했던 사안”이라며 “기아차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노동 친화적인 정책뿐 아니라 사법적 판단도 고려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적절하게 잘 막고 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