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양보에도 HDC현산 재실사 요구…아시아나 부채·항공업 불황 부담 작용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와 관련해 재실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난 12월에 이어 지난 9월 2일 재차 전달하면서 계약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장 예상보다 HDC현산이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산은이 파격 제안을 했지만, HDC현산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고민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과 HDC현대산업개발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전 연장전에 돌입했다. 사진=아시아나항공
지난 8월 26일 이 회장과 정 회장은 산업은행 본사에서 회동을 가졌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인수 조건과 관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겠다는 방침을 전했는데, 구체적으로 산업은행은 채권단과 HDC현산이 각각 최대 1조 5000억 원씩 총 3조 원을 아시아나 경영 정상화에 투입하는 내용의 공동투자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해왔다.
이 경우 HDC현산은 인수금액인 2조 5000억 원보다 1조 원 낮은 가격에 아시아나를 인수할 수 있다. 회장들의 회동 이후 별도로 HDC현산 측에도 이 방안이 전달된 것으로 전해진다. IB(투자은행)업계 일각에선 이를 두고 “산은이 코로나19로 인한 손실을 사실상 보전해주는 수준에 가까운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고 평가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산은이 제시한 방안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정 회장의 입장은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전해진다. 코로나19로 인해 눈덩이처럼 커진 항공업 불확실성과 인수 이후 HDC그룹까지 번질 파장 등은 정몽규 회장 입장에선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실제 그동안 HDC현산은 아시아나항공의 ‘빚’을 이번 인수전의 핵심으로 꼽아왔다. 빚 수준에 따라 아시아나항공 정상화뿐만 아니라 회사의 생존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코로나19 확산 전인 지난해 말 연결 기준 부채비율이 1386.7%였다. 부분자본잠식 상태였고 자본잠식률은 18.6%를 기록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부채비율은 6279.8%까지 치솟았고, 부채는 약 12조 원까지 늘었다. 적자가 쌓이고 쌓이면서 결손금이 누적되다 자본까지 갉아먹어 결국 지난 6월 말 자본잠식률은 49.8%까지 악화됐다. 아시아나항공과 같은 대형항공사(FSC)인 대한항공은 코로나19 여파 속에서 부채비율을 1200%, 저비용항공사들은 300~400%를 유지하고 있다.
HDC현산은 2019년 12월 금호산업과 SPA 계약을 체결하면서 아시아나항공의 부채비율을 200~300%까지 낮추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금호산업이 가진 아시아나항공 지분 30.77%를 3229억 원에 매입, 2조 1771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등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현재 재무 상황을 토대로 계산하면 아시아나항공의 부채비율을 300%로 맞추기 위해선 약 4조 4000억 원가량이 필요할 것으로 평가된다. HDC현산이 자력으로 마련하는 2조여 원으로는 부채비율을 550%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데에 그친다.
채권단의 돈이 공동투자 형태로 더 투입되면 당장 부채비율은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엔 부채 규모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채권단이 아시아나항공 지원을 위해 자금을 투입한 방식은 마이너스 통장격인 한도대출(총 3조 3000억 원), 영구채(8000억 원) 등이다. 이 가운데 마이너스통장 대부분은 이미 대출 상환으로 사용됐다. 영구채는 당초 아시아나 인수가 마무리되면 채권단이 주식으로 전환해 돌려 받을 계획이었지만, 최근 일부(7000억 원)를 인수하는 방식 또는 추후 HDC현산이 살 수 있도록 하는 방식 등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12조 원에 달하는 빚 규모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지난해 말까지 HDC현산은 부채비율을 96%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진 만큼만 빌려 쓰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올해 2분기 부채비율이 111%까지 올랐고, 순차입금 비율도 26.4%에서 58%까지 올랐다. HDC현산이 내야 할 연간 이자비용은 460억 원까지 치솟았다. 아시아나 인수에 필요한 실탄을 쌓기 위해 유상증자, 회사채 발행 등으로 1조 7000억 원을 마련한 결과다.
현재 아시아나항공의 빚은 HDC현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빚, 그 자체’인 회사를 인수할 경우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한 항공업 불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항공 업계와 증권가에선 내년 말에는 정상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치료제나 백신이 나온다 하더라도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HDC현산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미래에셋은 최근 7조 원 규모의 미국 내 15개 고급호텔 인수 계약을 두고 중국 안방보험과 소송을 벌이고 있다. 대규모 자금 지원은 물론 당초 계획한 항공업-호텔 사업 시너지마저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채권단의 공동투자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단순히 인수금액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앞으로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을 위해 얼마를 더 쓰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며 “최악의 시나리오는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에 자금을 투입하다 함께 망가지는 것이다. 인수 이후 현금 흐름이 담보되지 않으면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본사. 사진=이종현 기자
HDC현산이 재차 재실사를 요청하면서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은 만큼, 산은 등 채권단은 인수 의사가 없다는 취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이제 양쪽이 협의점을 찾기는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향후 채권단과 별개로 계약 당사자인 금호산업이 HDC현산의 최종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정식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할 것으로 전망된다. 산은 등 채권단은 플랜B를 가동할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산은 안팎에선 회동 전부터 매각무산을 감안해 다른 계획을 마련해 뒀다는 말이 파다했다. 플랜B가 가동되면 채권단이 일단 아시아나항공 정상화 작업을 하고 추후 구조조정을 진행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