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등 채권단-HDC현산 계약 해제 확정…2500억 이행보증금 소송 책임공방 관측
9월 11일 최대현 KDB산업은행 부행장이 온라인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이로써 아시아나항공의 새 주인 찾기가 최종 무산됐다. 하지만 KDB산업은행 등 채권단과 HDC현대산업개발(현산)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는 아직 남아있다. 이번 인수합병 결렬의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이다. 산은과 HDC현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협상에 성실하게 임했는지가 핵심 쟁점이고, 코로나19 사태라는 전례 없는 상황에서 불거진 문제라는 점이 변수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무산됐다. 서울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본사. 사진=연합뉴스
아시아나항공 매각 무산(노딜)이 공식 선언됐다. 지난해 12월 금호산업과 HDC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한 후 9개월여 만에 결국 계약이 불발로 끝난 것이다.
산은 등 채권단은 곧바로 ‘플랜B’ 가동에 나섰다. 앞으로 채권단은 기간산업안정기금을 통해 즉시 2조 4000억 원가량의 유동성 공급에 나선다. 앞서 산은과 한국수출입은행이 아시아나항공 지원 과정에서 확보해 둔 영구채(8000억 원)는 주식으로 전환한다. 이 경우 아시아나항공 지분 37%를 갖게 돼 금호산업(30.7%)를 제치고 최대주주에 오르게 된다.
채권단은 인력 구조조정 등을 통해 아시아나항공 경영 정상화 작업에 나선다. 전통적인 산은식 구조조정이 단행될 전망이다. 재매각은 시장 여건이 좋아지면 추진할 예정이다. 문제는 시장에 인수자가 남았는지 여부인데, 앞서 산은이 HDC현산과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여러 경로로 ‘인수 후보군’ 기업들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득은 얻진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연내 재매각은 어렵고, 이르면 내년 상반기에 추진될 전망이다.
거래는 무산됐지만 채권단과 HDC현산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더 남아있다. 이번 사태의 귀책사유를 가리는 일이다. 본격적인 책임공방은 HDC현산이 2500억 원에 달하는 이행보증금을 둘러싼 소송에서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HDC현산-미래에셋 컨소시엄은 지난해 12월 거래금액 2조 5000억 원의 10%를 이행보증금으로 냈다. 거래가 무산되면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이 각각 322억 원, 2178억 원을 나눠 갖는 것으로 돼 있지만, HDC현산이 이를 고스란히 포기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없다.
채권단과 HDC현산의 입장차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이라 이행보증금을 돌려받으려면 소송전은 불가피하다. 누구의 책임이 더 큰지에 따라 계약금 반환 여부부터 반환 규모 등이 정해지는 만큼, 양측의 공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질 것으로 관측된다.
#코로나19, 불신이 거래 무산 불렀다
그동안 채권단과 HDC현산은 아시아나항공 거래를 둘러싸고 줄곧 평행선을 달려왔다. 그러나 양측 관계자들과 IB(투자은행)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모두 종합하면, 처음부터 이견이 컸던 건 아니었다.
인수자와 매도자 모두 이번 거래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인수 의지가 확고했다. 정몽규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계약 직후 돌연 건설 주력 기업에서 ‘모빌리티 그룹’으로 전환을 선언했는데, 이때 그린 큰 그림에도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필수로 여겼다고 한다. 9000명의 일자리가 걸린 국책 항공사의 경영 정상화 작업을 떠맡은 산은과 채권단도 이번 거래에 필사적이었다. HDC현산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맞춰줄 의사가 있다고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강조해왔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거래는 틀어졌다. 앞서의 관계자들은 두 가지 이유를 꼽는다. 코로나19가 근본 원인이고, 불신이 갈등을 키웠다. 코로나19로 엇나가기 시작한 양측의 접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벌어지기만 했다.
올해 코로나19가 전세계를 덮치면서 항공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미 부실화돼 있던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여건은 더욱 악화됐다. 감염병이 확산될수록 인수 대상자인 HDC현산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기업 간 M&A는 인수 후 이득이 크면 당장 출혈이 있더라도 진행된다”며 “그러나 HDC현산은 인수 이후 항공업이 회생할 때까지 이득은커녕 ‘회사가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장고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였던 HDC현산은 지난 4월부터 태도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돌연 계약 당시 약속한 잔금 지급 일정을 미루면서 “금호그룹과 아시아나항공이 요청한 자료를 제대로 주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두 달 뒤인 6월에는 “계약 당시와 비교해 상황이 급변했고 금호그룹과 아시아나항공의 회계 처리를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기까지 했다.
동시에 채권단에 대한 불만도 함께 드러냈다. 아시아나항공에 1조 7000억 원의 긴급자금이 수혈됐는데, 인수 대상자가 정해져 있음에도 동의 없이 통보만 하고 빚을 늘렸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HDC현산 안팎에선 정몽규 회장이 이 수혈 건에 대해 크게 화를 냈다고 알려졌다. 재실사를 골자로 한 재협상 요구가 이때 나왔다.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본사. 사진=이종현 기자
이 시기 아시아나항공에 대규모 혈세가 투입된 탓에 산은은 물론 금융위원회와 국토교통부, 청와대까지 직간접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HDC현산 입장에선 ‘시어머니’가 여럿 생긴 셈이다. 그간 외부와의 소통을 점차 줄이고 있었던 HDC현산은 끝내 소통의 끈을 잘라버렸다. 금호그룹이든 채권단이든 실무자 접촉 없이 ‘내용증명‘을 통해서만 대화를 하겠다고 못박았다.
IB업계에선 HDC현산의 ‘내용증명 협상’을 비롯한 인수 과정에서 보인 행보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다. 코로나19 사태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거래 과정에서의 상황 대처들이 적절한 편은 아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두고 최근 업계 일각에선 HDC그룹이 범(汎) 현대가 그룹사 가운데 상대적으로 빅딜이 없었던 탓에 역량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이 같은 HDC현산의 ‘뜻밖 행보’가 오히려 국내외 인수합병 전문가들과만 거래를 해온 채권단, 특히 산은을 당황스럽게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실제 계약 해제 선언 직전까지 거래 주도권을 HDC현산이 쥐고 있었다는 것이 이 설명을 뒷받침한다. 다른 IB업계 관계자는 “통상의 기업 M&A 과정에서 보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양 측이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채권단 “할 만큼 했다”
채권단은 HDC현산에 대해 당혹감을 넘어 불쾌감을 내비치고 있다. ‘HDC현산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항공업 불황으로 계약 당시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재실사 등은 무리한 요구라는 입장이다. 이미 아시아나항공 실사단을 파견해 7주간 실사를 한 데다 불만을 나타낸 회계 처리 등도 모두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1조 7000억 원 수혈도 그 과정에서 HDC현산을 ‘패싱’했다기보다는 아시아나항공에 심폐소생술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단 ‘긴급 조치’로 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채권단은 HDC현산이 이 내용들을 정말 몰랐을 리가 없고, 재협상과 재실사를 요구하면서도 ‘인수 의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시간만 끌고 거래할 생각이 없다’ ‘계약금 반환 소송을 염두에 두고 명분만 쌓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채권단은 이번 거래 무산의 책임도 HDC현산에 있다고 주장한다. HDC현산의 태도 문제는 제외하고서도 채권단은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이다. 실제 ‘계약 해지’까지 거론되는 등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HDC현산에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하라”며 맞춰줄 수 있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채권단 안팎에선 “이 정도로 상대 측 입장을 배려해 양보한 건 극히 이례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사진=이종현 기자
채권단 주장을 뒷받침하는 쪽은 지난 8월 26일 열린 이동걸 산은 회장과 정몽규 회장의 회동을 특히 주목한다. 이 회장은 이날 정 회장에게 파격제안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인 제안은 채권단과 HDC현산이 각각 1조 5000억 원씩 ‘공동투자’하는 방안이다. 사실상 HDC현산이 부담해야 할 인수가격에서 절반을 깎아주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최근 채권단 안팎에선 이 제안 외에도 추가 논의들이 더 있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특히 금호그룹이 가진 아시아나항공 구주 가격을 낮춰주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구주 가격 조정은 HDC현산의 요구에 포함돼 있었지만 이미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포기한 금호그룹의 반대 입장이 강경했고, 채권단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공동투자 방안과 함께 구주 가격까지 인하될 경우 HDC현산의 인수 부담도 크게 낮아진다.
채권단은 지난 8월 산은-HDC현산 회장들의 회동 이후 거래 무산이 기정사실화되자 곧바로 아시아나항공 주주 감자 논의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감자는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정해진 비율만큼 주식수를 잃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동안 채권단 내부에서 검토만 했을 뿐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던 방안이다. 여전히 금호그룹이 큰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만 채권단 내에서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이동걸 회장이 회동에서 정몽규 회장에게 구주 가격 인하를 제안했을 것이라는 관측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채권단과 HDC현산은 이 회동에서 오간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채권단은 인수조건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논의했다는 점만은 강조하고 있다. 향후 채권단은 이 회장이 제안한 조건 내용과 앞서의 협상 과정을 더해 HDC현산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거래 종결을 위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고 주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HDC현산은 회동 일주일 뒤 채권단에 재차 ‘재실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이메일’만 보냈다. 채권단이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노딜 선언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다. 이에 대해 IB업계에선 의견이 엇갈린다. HDC현산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재실사’가 사실상 답변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파격 제안을 받고서도 다른 언급 없이 재실사 요구만 해온 점은 ‘거래가 무산돼도 어쩔 수 없다’는 취지라는 것이다.
아시아나항공 거래 무산에도 HDC현대산업개발과 채권단의 줄다리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연합뉴스
금호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의 재무상태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기존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도 있다. 반복적인 재실사 요구가 금호와 채권단 쪽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부각해 모두 계약금 반환 소송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반대로 직접 계약 해지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실사를 다시 해야 한다는 입장은 인수 의지가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이 해석에 힘을 싣는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채권단의 입으로부터 거래 무산 선언이 나온 것을 근거로 “HDC현산이 인수 대상자의 지위를 원치 않게 박탈당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할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기업 인수합병 자문과 재판을 주로 맡는 법조계 관계자들 가운데 일부는 ‘중대악화사유(Material Adverse Change·MAC)’ 조항이 귀책사유를 가리는 데 주요한 검토 기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MAC 조항은 아시아나항공과 같은 피인수 기업의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등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인수자가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까지 돌려받을 수 있는 조항이다.
기업 인수합병 계약에 항상 등장하는 조항인 만큼 이번 아시아나항공 인수 계약서에도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채권단과 HDC현산 가운데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있다고 명확히 가리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소송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한 대형로펌 관계자는 “HDC현산은 코로나19 사태를 최상단에 내세울 것”이라며 “다만 계약 시기(2019년 12월)상 코로나19가 계약서에 명시됐을 수 없고, 관련 판례도 거의 없는 데다 예측 가능성, 가치 훼손의 경중, 관련 산업 전체의 영향 등 따져봐야 할 변수가 많다. 불확실성이 크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