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다가 실험했던 초반 삼삼 포석은 AI의 ‘블루스팟’…그처럼 친절한 책 남긴 최강자는 없어
1966년 사카다 에이오 9단(왼쪽)과 린하이펑 9단이 대결한 제5기 명인전 도전 5국. 사진=월간바둑 제공
사카다는 삼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잡화점을 하던 아버지는 바둑광이었다. 가게는 부인에게 맡기고 매일 내기바둑으로 소일했다. 어린 시절은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천방지축이었다. 사카다는 “아버지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바둑만 두느라 우리를 혼낼 틈조차 없었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때론 어깨 넘어 보면서 바둑 두는 법을 깨쳤다. 8세에 마스부치 다쓰코 3단(당시) 문하생이 되었다. 여선생이라 엄격한 훈도는 없었지만, 스스로 좋아해서 바둑을 두었고 스펀지처럼 기리를 흡수했다. 10세에 일본기원 원생이 되어 15세에 입단했다.
프로가 되어서도 승부에 대한 집념이 많이 앞섰다. 선배들이 복기할 때 지나치게 자기의견을 주장하다 바둑평론가 야스나가 하지메(우칭위안-기타니와 함께 신포석법을 썼던 저자)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거의 진 바둑도 잘 던지지 않았다. “내가 불리해진 건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곧 상대가 실수할 때가 온다”는 입장이었다. 공식대국에서 무려 22집 패를 기록하며 끝까지 둔 사례도 있다.
나중에 승부의 운이 다해 젊은 후배에게 타이틀을 넘겨주면서는 ‘바둑은 슬픈 드라마’라는 명언을 남겼다. 일본기원 이사장을 지냈고, 80세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혈기 왕성한 20대 후반에 일본기원에 반발해 별도 단체까지 결성했었지만, 은퇴 후 생을 정리하는 인터뷰에선 “일본기원과 바둑 팬이 있었기에 사카다가 있었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2010년 10월 22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1985년 1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9기 일본기성전 도전1국. 조치훈 9단의 기성 방어전이기도 했다.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사카다 에이오 9단(중앙 오른쪽)이 복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월간바둑 제공
승부의 업적보다 남긴 바둑적 유산이 더 크다. 사카다 전집도 그렇지만, 특히 ‘묘(妙) 시리즈’는 불멸의 저서다. 당대 최강자와 겨뤘던 자신의 실전에서 장면도를 골라 상세한 해설을 달았다. 1권 ‘공격의 묘’부터 ‘끝내기의 묘’까지 6권이 있다. 바둑 책 좀 봤다는 50대 이상 국내 바둑팬은 다 아는 비급이다. 심지어 그 시절 프로들은 이 책에서 심득을 얻어 입단하곤 했다. 예전 김수장 9단은 “지금 다시 꺼내 봐도 최고의 바둑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가서 1급 행세를 하려면 꿰차고 있어야 할 내용들이다. 지금 보면 옛 수법들이 눈에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바둑의 기본이 변하는 건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김수장이 옛 수법이라 말한 부분 중 일부는 이미 AI(인공지능) 신수법으로 재탄생했다. 예를 들어 사카다가 꾸준히 실험했던 초반 삼삼 포석은 현재 AI가 가장 사랑하는 블루스팟이다. 현대 프로기사들은 모두 AI를 나침판으로 삼는다. 사카다가 쓴 바둑책은 나침판과 더불어 항해지도로 쓸 만한 수준이다. 고수가 되려면 기술적으로 정점에 올랐던 이의 생각은 꼭 들어봐야 한다. 역대 최강자 누구도 사카다처럼 친절한 책을 남긴 이는 없었다.
작은 것 버리고 더 큰 곳으로 AI로 다시 보는 명장면(●후지사와 슈코 9단 ○사카다 에이오 9단) 장면도 사카다는 특히 1960~1970년대에 후지사와 슈코와 일인자를 다투며 수많은 명국을 남겼다. 장면도는 1960년 벽두에 두어진 제5기 일본 최고위결정전 도전4국이다. 초반 감각만 AI로 다시 살펴봤다. 이 바둑 포석에서 백6의 귀굳힘, 백12로 세워주며 선수로 먼저 귀실리를 차지하는 수법은 최근 AI에게 자주 나온다. 초반 흐름은 귀를 지키고, 변으로 벌리고 중앙을 향하는 실리형 포진이다. 먼저 중앙으로 날아오른 건 후지사와 슈코였다. 흑 17은 후지사와 슈코의 호방하고 화려한 기풍을 잘 보여준다. 우하 백모양을 삭감하면서 중앙 흑에 힘을 실어주는 한 수다. 백이 우변을 실전처럼 받아줬을 때 흑이 19, 21로 날아오르는 감각이 아주 멋지다. 실전 22와 24은 침입할 타이밍이 아니었지만, 사카다는 중앙에서 현란한 타개솜씨를 발휘해 최후엔 9집 승리를 거뒀다. 참고도1 [참고도1] AI 3원칙 귀→변→중앙 로봇의 3원칙처럼 바둑 AI에 내재한 3원칙이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제1원칙 ‘귀에서 실리를 챙겨라’, 제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변에서 실리를 챙겨라’, 제3원칙 ‘1원칙과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중앙에서 실리를 챙겨라’. AI는 마치 ‘실리의 화신’처럼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참고도1은 후지사와 슈코가 둔 흑1에 AI가 내려준 대책이다. A로 2차 삭감은 각오하고 더 큰 곳으로 돌을 뿌린다. AI의 원칙대로 귀-변-중앙 순서다. 참고도2 [참고도2] AI는 사소취대의 실천자 후지사와 슈코는 국 후 실전 B보다 한 칸 완만한 C자리로 두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AI가 가리킨 건 좌하귀였다. 여전히 귀-변-중앙의 순서를 지킨다. AI는 상대의 중앙모양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타개수법과 균형은 신의 경지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백이 B나 C로 두어도 흑이 AI라면 바로 공격하지 않는다. 집으로 가장 큰 자리를 우선하는 착점이 바로 AI가 지키는 원칙이다. AI가 추천하던 대세점은 여전히 좌하귀 방면이었다. 실전(장면도 백32)에선 결국 사카다의 손이 먼저 갔다. AI 바둑은 빠르다. 손 빼는 수순들이 더 없이 현란하다. 과감하게 스피드만 추구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위기십결에서 말하는 사소취대(捨小就大). AI는 ‘작은 것을 버리고 더 큰 곳으로 나아가라’는 지침을 철저하게 실천한다. |
‘선실리 후타개’ 귀기 어린 싸움. 중앙에서 가공할 수읽기와 예리한 감각. 수많은 고수들이 승부에서 그의 길을 배우고 따랐다. 한국에선 이세돌, 강동윤 9단 등이 가장 유사한 부류다. 특히 현란한 타개수법과 묘수를 찾아내는 바둑스타일은 이세돌이 쏙 빼닮았다. 둘 다 미묘한 선택의 갈림길에선 상대가 실수할 가능성이 높은 현란한 수를 즐겼다. AI와 달리 인간은 이런 수에 잘 흔들리고 승부에서 이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카다는 본능적으로 느끼는 승부의 냄새를 믿는 쪽이었다. 승부처가 나오면 프로라면 다 아는 정수와 격식은 버렸다. 상대를 길이 없는 정글로 잡아챘다. 앞이 깜깜한 곳에서 자신도 피를 철철 흘리며 19로를 헤쳐 결국 활로를 뚫고 살아남는다. 이런 강렬하고 사나운 바둑으로 팬들을 흥분시켰고, 일본바둑 황금기를 일궈냈다. 이세돌도 그랬다.
지난여름 한국기원 지하에서 고가의 신형 노트북에 AI 프로그램을 설치하던 최규병 9단을 만났다. 바둑서적 수집가로도 알고 있던 그도 결국 AI교 신도가 되었다. 노트북을 세팅하는 동안에도 일본 도쿄에 있는 한 바둑전문 서점에 대해 한참 설명을 들었다. 물었다. “그런데 아마추어들은 AI 수법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최규병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사카다의 묘(妙)를 다시 읽어 보세요”라고 말해주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바둑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