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MB 사돈댁’ 한번 쿡!
▲ 조석래 회장(왼쪽)이 올초 사돈인 이명박 대통령과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신년인사회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김용대 부장판사)는 지난 4일 10년간 회사 돈 77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효성건설 고문 송 아무개 씨(67)에게 징역 3년, 상무 안 아무개 씨(62)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은 공사 현장의 노무비를 부풀려 회사에 청구하는 방식으로 돈을 챙긴 혐의로 지난해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아왔다. 재판부는 “증거 자료와 회계 장부 등을 조사해 횡령죄를 적용할 수 있는 금액은 최고 37억~46억 원으로 볼 수 있다”고 밝힌 상태다.
그런데 재판부가 이번 비자금이 조석래 회장 등 효성 오너 일가에게로 유입됐을 가능성을 언급해 눈길을 끌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조석래 회장 등 오너 일가에 돈이 전달된 구체적 정황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재판부의 시선은 달랐다. 비자금 장부에 ‘SBD’라고 표기된 항목이 있는데 이는 조 회장 자택이 있는 성북동을 의미하며 ‘벽제’라고 기재된 항목은 경기도 고양시 벽제 기념관 내에 있는 고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묘지를 뜻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즉, 이번에 밝혀진 비자금 중 상당액이 조석래 회장 자택과 조홍제 창업주 묘지 관리 비용에 들어갔을 가능성에 재판부가 주목한 것이다.
그밖에 조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양학원과 조 회장의 세 아들들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두미종합개발에도 송 씨 등이 빼돌린 자금의 일부가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재판부에선 송 씨 등이 조 회장에게 잘 보이고 그룹 내에서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이 같은 자금 집행을 한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다.
효성 비자금에 대한 수사당국의 조사는 이미 4년 전부터 이뤄져 왔다. 검찰은 지난 2006년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으로부터 효성그룹 내 석연치 않은 자금 흐름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난해 초엔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효성그룹이 200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제보가 검찰에 전해졌다.
지난해 효성 비자금 수사가 시작될 때부터 세간의 관심은 회사 돈 횡령에 조 회장 등 오너 일가가 관여했는지, 그리고 횡령으로 조성된 비자금 중 일부가 오너 일가에게로 유입됐는지에 집중돼 왔다. 그러나 수사 진척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효성 측은 “오너 일가와 무관한 일”이란 입장을 줄곧 밝혀왔다.
지난해 검찰에서 내로라하는 특수통 검사들이 수사에 동원되면서 효성 오너 일가의 비자금 관련 여부가 커다란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지난해 9월 30일 검찰은 송 씨와 안 씨의 개인 횡령으로 사건을 종료하면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검찰은 송 씨와 안 씨에 대해 두 차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이 이를 모두 기각해 결국 불구속 기소로 처리됐다. 당시 검찰 주변에선 횡령 액수가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검찰이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신청했던 점을 들어 검찰이 오너 일가의 비자금 관련 정황을 파헤치고 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가 개인 횡령으로 귀결되면서 ‘효성이 대통령 사돈기업 덕을 본다’는 비아냥거림이 커지기도 했다.
이번에 1심 재판부가 판결을 통해 비자금과 오너 일가의 관계를 언급한 것은 그동안 효성 비자금에 대해 제기돼 온 ‘봐주기 수사’ 논란과 맞물려 묘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지난해 법원이 두 차례에 걸쳐 검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던 이유는 “빼돌린 돈이 회사 운영에 쓰였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송 씨 등이 횡령한 돈의 일부가 조 회장 등을 위해 사용됐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법조계에선 1심 판결이 조 회장 일가에 대한 소환 등 수사 확대를 부를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횡령 액수가 크지 않은 까닭에서다. 적어도 수천억 원이 거론됐던 다른 재벌가 비자금 사건들에 비하면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비자금 수십억 원은 비교적 경미해 보인다. 재판부가 횡령 금액 중 일부가 조 회장 일가를 위해 쓰였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송 씨 등이 그룹 내 위상을 위해 자금을 집행했을 것’이란 단서를 단 것 역시 조 회장 일가를 검찰 포토라인에 세울 가능성을 희석시키는 대목이다.
비자금 수사 불똥이 오너 일가로 튈지를 떠나 효성은 요즘 쉽지 않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건설 계열사의 상황이 좋지 못한 것. 먼저 효성이 지난 2008년 1월 인수해 그동안 거액을 투자해온 진흥기업은 지난해 1495억 원 적자를 기록했고 올 1분기에도 319억 원 적자를 낸 상태다.
결국 지난 10일 진흥기업은 신주 3억 2000만 주를 발행하는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방식으로 총 1600억 원 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최대주주인 효성(지분율 23.95%)이 진흥기업 자금 흐름의 숨통을 터주려 거액을 지원해주게 될 전망이다.
이에 앞서 효성 계열사 갤럭시아디바이스는 6월 4일 공시를 통해 진흥기업 소유 4층 건물을 78억 9000만 원에 취득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건설사업 강화를 위해 인수한 회사가 애물단지가 된 셈이다. 주력 계열사인 효성건설도 지난해까지 5년 연속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효성은 지난해 하이닉스 인수를 추진했다가 “인수할 능력이 없다”는 관측 속에 인수 계획을 철회하면서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조석래 회장 입장에선 아무쪼록 이번 비자금 수사 판결이 새로운 고민거리가 아니라 ‘비 온 뒤 땅 굳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