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차 대세 등 패러다임 격변 시기 새 리더십 필요…업황 악화 속 ‘안정 대신 변화’ 승부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현대차그룹 제공
20년 만에 수장 교체다. 정의선 회장 취임은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는 지난 14일 오전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고, 정 수석부회장의 회장 선임 안건을 보고했다. 각 사 이사회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현대차그룹은 ‘품질경영’을 앞세운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기아자동차, 한보철강, 현대건설 등을 인수하며 사세를 키웠다. 자산규모는 20년 만에 7배가량 늘어났다. 글로벌 시장 공략도 이 시기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해외 생산거점 확충과 미국, 유럽, 중국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판매와 생산에서 글로벌 5위권으로 도약한 현대차그룹은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문제는 최근 시장이 격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드높았던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 내연기관의 종말을 예고하는 목소리는 이제 대세가 된 지 오래다. 전기차 등 친환경차 시장은 해마다 급성장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현대차가 서 있다. 기업의 가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가총액을 보면 지난 15일 기준 테슬라의 시총은 492조 6000억여 원. 현대차의 시총은 37조 6000억 원 수준이다. 10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더 이상 판매량만 놓고 순위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새로운 시장에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회장 정의선’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제조 기업’에서 ‘미래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변모하겠다는 전략이다. 향후 자동차 관련 매출 비중을 50% 수준까지 낮춘다는 계획이다.
청사진은 나왔다. 정의선 회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취임 메시지를 통해 “성능과 가치를 모두 갖춘 전기차로 모든 고객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이동수단을 구현하겠다”며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자율주행기술을 개발하여 고객에게 새로운 이동경험을 실현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연료전지 기술을 자동차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 활용해 인류의 미래 친환경 에너지 솔루션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보틱스, UAM(도심 항공 모빌리티), 스마트시티 같은 상상 속의 미래 모습을 더욱 빠르게 현실화시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정의선 회장은 이제 비전 제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겨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그간의 행보는 성공적이었다. 정 회장은 1999년 현대차에 입사해 2002년 현대차 전무, 2003년 기아차 부사장, 2005년 기아차 사장, 2009년 현대차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2018년부터는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을 맡아 왔다.
기아차 사장 당시 디자인경영을 통해 기아차를 흑자로 전환시키고, 현대차 부회장 재임 기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에 맞서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시켜 안착시킨 점도 업적으로 꼽힌다. 그간의 성과가 이번 회장 취임의 발판이 됐다. 현대차 관계자 역시 “오너 일가라도 성과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회장 취임”이라면서 “정의선 회장에게 미래 시장을 선도적으로 바꿀 기회를 주기 위해 정몽구 회장이 결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회장’의 무게감은 기존 ‘부회장’ 혹은 ‘황태자’와 전혀 다르다. 오롯하게 성과의 과실을 얻을 수도, 그룹 향배가 걸린 사안의 최종결정권자로 책임을 질 수도 있다. 기회이자 위기인 셈이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코로나19 등으로 시장 상황이 얼어붙은 가운데 현대차의 지난 2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반토막이 났다. 하지만 미래 사업의 성과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비전을 제시한다면, 발목이 잡힌 지배구조 개편 등에서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주주 입장에서 입증된 리더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그간 미래 모빌리티 사업 강화를 위해 활발한 투자를 진행해왔다. 미국 자율주행 업체 앱티브와 합작법인인 ‘모셔널’을 설립했고 해외 공유 서비스 업체에 최근 2년간 투자한 금액만 7500억 원을 웃돈다. 전동화, 수소차 시장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관련 사업을 진두지휘한 것이 정의선 회장이다. 정 회장의 취임 첫날 공식 행보는 수소차 관련 행사였다. 앞선 투자처는 모두 내연기관 시대 이후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먹거리로 꼽히는 것들이다. 선제적인 투자에 이은 서비스 혁신 등을 위해서는 보다 강력하고 일원화된 의사결정 체제가 필요하다.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안정 대신 변화와 혁신의 동력을 위한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과거보다 변화의 속도는 한층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대내외 상황이 엄중한 시기에 정의선 회장의 취임은 미래성장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고객 중심 가치를 실현하며 조직의 변화와 혁신을 더욱 가속화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선 회장의 취임 일성 중 직원들에게 ‘개척자’ 정신과 ‘미래를 향한 담대한 여정’을 강조한 것도 변화를 예상하는 배경이다. 그 변화의 속도와 방향성에 현대차그룹과 정의선 회장의 운명이 달렸다.
임홍규 기자 bent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