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 보궐선거 명분보다 실리 택해…역풍 우려 있지만 무기력한 야당에 승리 자신감도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10월 2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제19차 온택트 의원총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신)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4월 재보선에서 전패한 뒤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혁신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른바 ‘김상곤 혁신위’다. 김상곤 혁신위는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세웠다. 패권주의 논란 등으로 논란에 휩싸였던 문재인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이는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승리의 발판이 됐다. 그만큼 김상곤 혁신위는 문재인 정부에게도 의미가 남다르다.
김상곤표 정치개혁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 중 하나는 당헌 96조 2항이다.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사건 등 중대한 잘못으로 그 직위를 상실하여 재보궐 선거를 실시하게 될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이다. 부정부패 사건뿐 아니라 ‘중대한 잘못’일 경우에도 무공천을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 당헌을 두고 김상곤 위원장은 “실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헌이 만들어진 두 달 뒤인 2015년 8월 경남 고성에선 군수 재선거가 열렸다.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소속 군수가 선거법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문재인 당시 대표는 유세 현장에서 “재보선에 책임 있는 정당은 후보를 내지 말자, 그런 식의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래야 우리 정치가 발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재보궐 선거에 원인을 제공한 정당은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박원순 오거돈 전 시장 성추문으로 보궐선거가 확정된 이후 이 당헌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민주당은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헌대로라면 후보를 내지 않는 게 맞지만 대선 민심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서울과 부산에서 선거가 열린다는 것 때문이었다. 야권에선 연일 ‘약속대로 공천을 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여권 내에서도 무공천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유력 차기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7월 “정치는 신뢰가 중요하다.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에 무공천 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또 다른 잠룡 김부겸 전 의원은 “대한민국의 수도와 제2 도시에서 치러질 내년 보궐선거는 향후 치러질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당헌·당규를 바꾸는 것에 대한) 국민의 비판이 있다면 질타를 받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여권 주류인 친문 진영에선 당헌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기류가 우세했다. 지난 9월초 한 친문 의원은 사석에서 “집권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 무조건 (공천을) 해야 한다”고 했다. 친문 일각에선 박원순 오거돈 전 시장이 ‘무공천 당헌’에 규정된 ‘중대한 잘못’에 해당하느냐라는 물음도 들렸다. 해석하기에 따라 무공천 당헌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낙연 대표는 공천 문제를 연말께 다루자는 입장이었다. 당 안팎 및 세간의 여론을 최대한 들어본 뒤 결정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굳이 미룰 이유가 있느냐’는 요구가 거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10월 29일 무공천 당헌 개정 여부를 당원투표 결과에 따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민주당 지지자들 상당수가 공천에 긍정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무공천 당헌을 폐기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됐다.
야권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온갖 비양심적인 일을 다 하는데, 천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만든 당헌을 민주당이 어겼다는 부분을 집중 부각하는 모양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집권 여당의 통 큰 책임정치를 기대한 국민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여당에서도 우려하는 기류가 흐르지만 공개적인 발언은 나오지 않고 있다. 민주당 한 재선 의원 “어차피 임기가 길어봐야 1년도 안 되는 자리들인데 왜 이리 무리수를 두는지 모르겠다. 깔끔하게 포기해 명분을 쌓고,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노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냥 입을 닫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친문계의 한 초선 의원도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잘 안다. 공천을 할 거라면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 ‘중대한 잘못’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들리던데, 요즘 세상에 성 문제가 중대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자칫 선거에서 지기라도 하면 어쩔 것이냐.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4월 보궐선거가 갖는 정치적 상징성과 함께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우선, 여권 주류인 친문 지지자들이 공천에 압도적 찬성을 나타냈던 부분이 거론된다. 민주당이 핵심 지지층의 여론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이는 그동안 민주당이 지나치게 친문 지지층에 휘둘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과 맞닿아 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과 연관 짓는 시선도 있다. 당헌을 바꿔 후보를 내더라도 지지 추세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고, 결국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공천 강행의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민의힘의 한 의원은 “온갖 일이 터져도 우리 당 지지율은 떨어지고만 있다. 민주당이 온갖 편법, 말 바꾸기를 하는 것도 결국 ‘그래도 선거는 이긴다’라는 판단 때문일 것”이라면서 “집권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국민의힘이 누굴 탓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