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동생 해승·은미 씨 ‘부친 성년후견’ 심판 신청…“어머니 유산 돌려달라니, 아버지 뜻일 리 없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동생들 사이 소송전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정태영 부회장 페이스북
정 부회장은 유언의 필체가 어머니와 동일하지 않아 보이고 정상적 인지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8월 1심 법원은 필적 감정과 의료기록감정 결과 어머니 조 씨가 작성한 것이 맞다며 유언의 법적 효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 부회장이 아버지 정경진 창업주와 함께 어머니 상속분에 대한 유류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승소하더라도 상속세 등을 지불하면 정 부회장이 실질적으로 받는 돈은 수천만 원 수준이다.
정 부회장 연봉은 약 40억 원으로 금융업계에서 ‘연봉킹’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이 같은 소송을 진행한 것은 재산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라고 알려졌다(관련기사 두 동생 상대 ‘2억 원 소송’,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왜?). 이에 차남과 막내딸 은미 씨는 (면접교섭권과)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제기했다. 치매 상태가 심각한 아버지가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일요신문이 은미 씨에게 심판을 제기한 자세한 이유를 들어봤다. 다음은 은미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오빠인 정 부회장이 유류분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어머니는 재산을 어떻게 상속할지 유언장을 통해 분명하게 유지를 밝혔다. 물론 큰오빠(정태영 부회장)가 굳이 법적 유류분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줘야 한다. 다만 소송에는 아버지 이름도 포함돼 있다. 아버지가 작은오빠(정해승 씨)나 나에게 어머니 유언장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한다거나 유류분 청구소송을 한 건 본인의 뜻일 리가 없다. 더구나 지금 아버지는 그럴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은 뭔가.
“어머니는 오랫동안 건강이 안 좋으셨던 아버지를 이제껏 돌보다가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돼 결국 돌아가셨다. 그런 어머니가 아프신 와중에도 작성하신 유언장 내용을 두고 심각하게 건강이 안 좋으신 91세 아버지가 유언장의 필체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소송에서 패소하자 상속분을 달라고 유류분 청구 소송을 했다. 특히 어머니가 남기신 재산은 아버지가 내게 줬던 부동산 일부도 포함돼 있다. 이건 우리 집이나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정 부회장 의견을 전달한 서울PMC 측은 “CEO(최고경영자)의 개인적인 입장이어서 말하기 어렵지만 홀로 남아 몸이 불편해 많은 도움이 필요한 분에게 상속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로 당연하다고 판단해 아버지에게로 유산 상속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해온 바 있다.
“2019년 아버지가 창업해 평생 일하셨던 회사에서 퇴직처리 하면서 받은 퇴직금만 해도 40억~50억 원은 된다고 들었다. 91세에 혼자 움직이기도 어렵고 죽 한 숟갈 넘기기도 힘들어하신다. 아버지가 가부장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평생 쌈짓돈 모아 딸에게 준 자식의 돈까지 인생 말년에 다시 빼앗아 갈 정도로 야박하고 욕심 사나우신 분은 절대 아니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경진 창업주와 정 부회장은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 승소 시 받게 될 유산 전액을 정경진 이사장이 설립해 운영 중인 ‘용문장학회’에 기부하겠다는 계획이 알려지기도 했다.
“용문장학회는 아버지가 설립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애정을 갖고 있진 않았다. 사람에 실망하는 일을 몇 번 겪으셨다고 알고 있다. 더구나 아버지가 굳이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준 돈을 소송까지 해가며 뺏어 기증하신다는 게 말이 되나. 아버지 본인의 뜻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서울 여의도 현대캐피탈·현대카드 본사. 사진=고성준 기자
―정경진 창업주 상태는 어떤가.
“아버지는 30대부터 당뇨가 심하셨다. 2000년 초반부터 심각한 심혈관 질환으로 건강을 잃으셨고, 치매도 서서히 와서 2017년부터는 정식으로 치매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치매 치료를 통해 진행 속도를 늦추려 노력했지만 치매상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된 지는 이미 꽤 됐다. 자식들 이름을 기억 못하신 지도 오래됐고, 본인 이름도 잘 모르실 때가 많다. 지금은 중환자실과 입원실을 오갈 정도로 건강이 안좋은 상태다.”
―성년후견개시(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인해 사무처리가 불가능한 경우에 가정법원으로부터 의사 감정과 당사자 진술을 받는 과정을 거쳐 성년후견인을 선임받는 제도)를 신청한 배경은 뭔가.
“아버지의 건강과 치매 상태가 심각하다고 법적으로 인정받는 성년후견인을 신청하는 게 어떤 면으로는 불경스럽게 느껴져서 참 많이 망설였다. 어머니 유언장 소송에서 아버지가 정 부회장과 같이 이의 제기를 했다고 했을 때도 그런 마음 때문에 진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유류분 청구소송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아버지가 정말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하신다면 당연히 돌려드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아버지 본인의 뜻일 수가 없다. 아버지 명예 때문이라도 이제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명예라는 건 어떤 얘긴가.
“아버지는 둘째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해 당신의 부모는 물론 당신의 형, 동생까지 온 집안을 돌보신 분이다. 그리고 아직도 꽤 많은 자산을 가지고 계시다. 그런 분이 막내딸의 돈을 달라고 소송까지 하는 아버지로 인생을 마감한다는 건 아마 상상조차 못해보셨을 것이다. 아신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아버지 당신의 뜻이 아님을 밝혀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성년후견개시 외에도 정경진 창업주를 매주 1회 면접 교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구도 같이 했다.
“어머니가 투병 중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됐다. 이후 아버지의 주소를 알 수가 없다. 아버지는 중증 치매 상태로 먼저 우리 쪽으로 연락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병환이 매우 위중해 중환자실을 오가며 입원 치료를 받고 계시는 만큼 언제 급작스런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어 1주일에 한 번은 꼭 만났으면 한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은미 씨와 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입관·영결·하관식 장례 절차에 나타나지 않아 소송에 이르렀다는 추측도 나왔다.
“어머니가 쓰러지기 전, 아버지를 모시고 마지막으로 여행을 간 게 나였다. 매일 어머니 병문안을 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휠체어를 밀고 병원 복도 산책을 모시곤 하던 것도 나였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시던 1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머니 곁에 있었다. 어머니는 눈 감으시던 그 순간에도 내 품에 계셨다. 하지만 병원 사람들이 시신을 안치실로 옮기기 위해 어머니에게 하얀 천을 씌우려하는 그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뵙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내 방에서 팔베개를 해주며 같이 주무셨던 어머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어머니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관 속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또 흙으로 덮이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보면 감당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장면으로 이제까지 어머니와의 모든 기억이 다 덮일 것만 같았다. 어머니도 그것을 굳이 원하시진 않을 것 같았다. 내 품에 남아있던 엄마의 그 따뜻한 온기만 기억하고 싶었다.”
―장례 절차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어머니 시신이 안치실로 옮겨진 뒤 나는 곧바로 새벽 꽃시장으로 갔다. 어머니 장례제단을 내 손으로 직접 꾸며 드렸다. 평소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셨던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한 내 마지막 선물이었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장례식장에 가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혹시 시든 것이 없는지 제단 꽃을 살피고 오빠들이 장례식장에 올 때까지 일찍 오신 문상 손님들을 받으며 기다렸다. 어머니 장례 미사 가는 길에 집에 들러 노제를 할 수 있도록 이틀 동안 혼자 준비도 했다. 몇 달 동안 비워놓아 거의 폐가가 되어버린 집을 마당부터 구석까지 청소하고 꾸며 따뜻하게 어머니와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입관 절차 등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두고 뒷말이 계속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안 뵙고, 임종도 보지 못한 게 더 중대한 문제가 아닌지 묻고 싶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시던 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든 가족들이 너무 잘 안다. 그 1년 동안 어머니가 받았던 두 번의 위험한 수술 때 수술실로 들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본 것도, 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나 혼자였다. 그 1년 동안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어머니 곁에 있었다. 어머니가 받았던 수많은 검사와 시술, 수술, 치료를 위한 동의서 서명의 80~90%는 내가 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두 번째 패혈증 쇼크로 중환자실로 다시 옮겨질 때도, 최종적으로 치료 중단을 결정하고 꼬박 만 하루 동안 어머니 임종을 기다릴 때도, 당연히 제일 먼저 두 오빠에게 알렸지만 장례제단이 마련되고 나서 만 하루가 지날 때까지 장례식장은 작은오빠와 나, 우리 둘만 지키고 있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