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추미애 해결 약속했지만…국정원 “법무부·검찰 지휘로 조치한 것” vs 법무부 “소송 제기 관여 안해”
2013년 국정원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에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할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한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와 검찰을 동원해 간첩을 조작, 8명을 사형에 처하고 17명을 무기징역 등 장기투옥 시킨 사건이다.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피해자와 유가족(16가족 77명)들은 국정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 1심 판결 후 490억 원 배상금을 선지급 받았다.
하지만 2011년 대법원의 판례 변경으로 이들은 가지급된 배상금 중 211억 원을 반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였던 2013년 7월 피해자와 유가족 77명에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 대법원 승소를 받아냈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배상금을 돌려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이자까지 쌓이며 변제해야 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자 국정원은 배상금을 변제하지 못한 이들에게 재산 압류와 강제경매 처분을 시도하는 등 환수에 나섰다. 이에 피해자 및 유가족들은 법원에 ‘부동산 강제경매 결정에 대한 이의청구’를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하며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제20대 국회에서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및 유족 손해배상금 과다 지급분 환수 조치에 대한 문제가 다뤄졌다. 7월 27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박지원 국가정보원 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부동산 등 재산 강제처분 명령에 대해 법원이 조정·화해권고를 했음에도 국정원이 계속 거부하고 해결 안 하고 있다’는 질의에 대해 박지원 원장은 “현재 법원의 조정이 있다면 국정원의 잘못으로, 피해자들 배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법적 검토를 해 꼭 처리하겠다”며 “국정원에서 기계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원장으로 취임하면 의지를 가지고 법정신에 따라 잘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이어 10월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무부 국정감사에서도 ‘인혁당 사건 자체가 국가 폭력에 의해 사람의 생명까지 뺏은 사건이고, 이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국정원도 잘못한 것이라고 인정한 사건이다. 사건의 의미를 반영해 법원의 조정권고를 국가가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는 권고가 나왔다.
이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인혁당 사건은 국가의 불법성이 개재돼있는데, 피해자들의 고통을 국가가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지연이자가 보상금을 넘어가는 사정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국정원과 상의를 해 종결된 변론을 재개 신청하겠다. 또 법무부 내에 이 부분을 정리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법원의 조정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절차를 밟아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정치권 일각에선 국정원과 법무부가 서로 문제가 되는 소송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국정원이 원고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법무부는 대한민국을 대리해 소송만 맡았다.
그런데 국정원 측은 소송 제기 전 소송 수행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검찰 측에 알린 바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선지급금이 법무부 예산으로 지급돼 소관부처 및 환수주체가 법무부이고, 대법원 판결 확정으로 국정원의 소송사무는 종결됐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법무부와 검찰이 국정원에 지속적으로 초과 지급금 환수를 위한 소송 제기를 지휘했고, 결국 국정원이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법적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강제경매 신청도 검찰 지휘에 따라 진행했다고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조치가 있었던 기간 법무부 장관은 이귀남 권재진 황교안이었고, 검찰총장은 김준규 한상대 채동욱이었다.
법무부 측은 소송 제기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초과지급금 환수절차는 국가채권 관리 업무의 주체이자 관련 국가 소송의 수행청인 국정원이 진행했다는 것. 법무부 관계자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법무부는 소송 관련해 보고만 받고 있다”며 “국가배상금의 경우 법무부 예산에서 지급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관련 소송을 진행할 것인지 말지 장관 승인을 받는 기준은 10억 원 이상이다”라고 설명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측은 과거부터 두 기관이 서로 책임을 미뤄왔다고 했다. 4·9통일평화재단 관계자는 “국정원에 문제를 풀라고 하면 법무부에서 종용해서 소송 제기한 거라고 주장한다. 법무부는 배상금이 10억 원 이하라 국정원 소관이라고 말한다. 피해자 개별로 선지급금을 보면 4억~5억 원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 입장에선 법무부와 국정원이 책임을 서로 미루는 듯한 양상인 셈이다.
10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무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사진=박은숙 기자
법무부는 추미애 장관 국감 발언이 나온 이후인 10월 28일 산하에 ‘화합과 치유를 위한 국가송무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행정예고를 했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이 상대방에 부당한 피해 또는 헌법상의 기본권 행사를 위축시키는 문제를 유발하면, 소송의 수행·지휘·승인 등에 관해 심의하고 그 결과를 법무부 장관에 권고하는 목적을 담고 있다. 위원회는 학계·실무 등 외부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인혁당 피해자에 제기된 과다 선지급금에 대해 법리상 권리가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계속 검토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들이 제기한 ‘부동산 강제경매 결정에 대한 이의청구’ 항소심 선거는 11월 19일 등 올해 말 연이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 유가족 측에서 재판부에 당사자인 국정원과 합의 시도를 더 진행해보겠다고 선고기일 연기를 요청해, 오는 1월 등 내년으로 연기된 상황이다.
4·9통일평화재단 관계자는 “추미애 장관이 법무부 산하 위원회를 구성해 합리적인 안을 만들어보자는 입장인 만큼, 항소심 선고가 나기 전에 국정원과 법무부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린다”고 당부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법무부와 국정원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며 “박지원 원장과 추미애 장관이 소송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법무부에서는 이를 위한 위원회 설치도 예고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의미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반면 부당이득금을 법대로 환수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국민의힘 한 재선 의원은 “인혁당 피해자들이 반환하지 않고 소송을 벌이고 있는 초과 지급금은 국민의 세금이다. 그런데 법무부는 인혁당 피해자 구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며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부당 이득금 환수에 나서야 한다”고 비판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