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과다 지급분 환수’ 포기 시 배임 소지 우려…피해자들 “박지원 정치적 해결 기대”
8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7월 27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열린 박지원 국가정보원 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 및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금 과다 지급분을 반환하도록 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박지원 당시 원장 후보자는 “굉장히 잘못된 판결”이라고 밝혔다.
이어 ‘법원의 조정·화해권고가 있었음에도 국정원이 계속 거부하고 해결 안 하고 있다’는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 “현재 법원의 조정이 있다면 국정원의 잘못으로, 피해자들의 배상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법적 검토를 해서 꼭 처리하겠다”며 “국정원에서 기계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원장으로 취임하면 의지를 가지고 법정신에 따라 잘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전해철 정보위원장도 “법원에서 조정 권고를 했는데 현재 국정원에서 거부를 하고 있다고 법적 절차를 얘기하고 있다. 면밀하게 법적인 과정과 절차도 봐서 국정원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후보자가 약속한 대로 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하자, 박지원 후보자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인사청문회를 거쳐 박지원 원장이 취임한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최근 국정원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및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금 과다 지급분 환수 포기와 관련, 전향적 조치를 약속한 박지원 원장 발언과 다소 배치되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8월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배상금 과다 지급분 환수를 포기할 경우 배임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는 내용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이날 국정원 측은 정연주 전 KBS 사장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KBS는 국세청과 수년 동안 법인세 취소소송을 하다가, 2005년 법원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여 법인세 일부인 556억 원을 환급 받고 소송을 취하했다. 하지만 검찰은 판결까지 기다렸다면 법인세를 전액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봤다. 이에 조정을 받아들인 정연주 당시 사장의 판단이 KBS에 손해를 끼친 행위라고 해석, 정연주 사장을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정 전 사장은 이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국정원은 검찰 기소 가능성과 확정판결까지 이어질 법적 논란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와 검찰이 간첩을 조작, 무고한 사람 8명을 사형에 처하고 17명을 무기징역 등 장기투옥시킨 사건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 대통령 직속기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군사정권 시대 고문에 의해 과장·조작됐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 2008년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피해자와 유가족(16가족 77명)들은 국정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 2009년 6월 1심에서 국가가 위자료 279억 원을 비롯해 유죄판결이 확정된 1975년 4월 9일 시점부터 연 5% 지연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759억 원에 이르는 배상금을 받게 됐다.
1심 판결 후 이들은 서울중앙지법에 배상금 가집행을 신청, 법무부로부터 배상금의 3분의 2 수준인 490억 원을 선지급 받았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모임인 4·9통일평화재단에 따르면 형량과 수형기간, 피해나 질병 등에 따라 배상액이 다르지만 한 사람당 5억~7억 원, 한 가족당 15억~20억 원씩 돌아갔다.
2심 역시 1심과 같은 판결이 나왔지만, 상황은 대법원에서 반전됐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1·2심과 달리 “통상 위자료 배상채무 지연이자는 불법행위 시점에 발생하지만, 불법행위 이후 장기간이 흘러 통화가치 변동으로 과잉배상 문제가 생길 경우 사실심(손배청구소송 항소심) 변론 종결 시점부터 발생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배상금이 279억 원으로 산정되며,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미리 받은 490억 원 중 279억 원을 뺀 나머지 211억 원을 반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박근혜 정부던 2013년 7월 피해자와 유가족 77명에게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이 제기됐다. 소송 원고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정원이었고, 소송은 법무부가 맡았다. 한순간에 피고로 전락한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탄원서를 내고 법적투쟁도 했지만 결국 대법원까지 모두 패소했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배상금을 돌려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변제해야 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연 20%라는 연체이자율에 매일 수십만 원의 이자가 붙었다. 2017년부터는 국정원이 배상금을 변제하지 못한 이들에게 재산 압류와 강제경매 처분을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환수에 나섰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유가족들이 2012년 9월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를 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4·9통일평화재단과 피해자 유가족 측은 정치인 출신 국정원장이 들어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4·9통일평화재단 안경호 실장은 “6~7년 전 박지원 원장이 정보위원을 할 때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과 면담도 했다. 사건을 잘 알고 있다”며 “인사청문회에서 면피용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 약속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평가했다.
최근 정보위 업무보고에서 인혁당 사건 관련 입장에 대해서는 “실무 차원에서 기본입장을 반복한 것이라고 본다. 피해자들도 과거 정연주 전 사장 배임 사건이 많이 걸렸다. 그 부분 때문에 고민이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럼에도 결국 문제 해결은 실무진이 아니라 기관장이 결단하는 것이다. 박지원 원장이 정치적 정무적으로 풀어낼 거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 8월 20일 국정원 업무보고에 참석한 일부 정보위 소속 의원은 “법원 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배임은 아니라는 해석과 판례들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위 소속 민주당 중진 의원은 “국정원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니 기다려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국정원 측도 “국정원장은 관련 질의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배상금 환수를 포기할 경우 배임 등 소지가 있다’는 내부 법적 검토가 있다”며 “반면 ‘법원 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배임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단체나 법조인 등도 있어 법적인 해결방안이 있는지 검토하겠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설명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들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답답해하는 상황이다. 안경호 실장은 “국정원이 부동산 등 재산에 대해 강제명령을 내려, 피해자들이 ‘부동산 강제경매 결정에 대한 이의청구’를 제기했는데 1심에서 다 패소했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라며 “원래 7~8월 선고 기일이 다 잡혀있었다. 피해자 유가족 측에서 재판부에 당사자인 국정원과 합의 시도를 더 진행해보겠다고 선고기일 연기를 요청했다. 재판부도 화해 조정 권고를 한 만큼 요청을 받아줬지만, 현재 9~10월 선고기일이 잡혀있다. 항소심 선고가 나기 전에 국정원에서 해결을 위한 방법을 내놓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보는 것이다.
현재 피해자 및 유가족 측은 문제 해결을 위한 호소나 대응을 따로 하지 않고 있다. 안경호 실장은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다. 국회 등 정치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며 “다시 사건이 환기된 만큼 의원실 등을 통해 서면질의나 입장발표 등 의견개진을 할 계획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