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맥경화’ 해결엔 그 방법밖에…
▲ 채권단과 갈등을 겪고 있는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 |
지난 7월 29일 현대그룹 채권단은 운영위원회를 열고 8월부터 현대그룹에 대해 대출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현대그룹이 재무약정 체결에 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지난 7월 8일 신규 여신 중단 결정에 이은 두 번째 제재 조치를 통해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금융권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할 길을 사실상 막아버렸다. 이번 채권단 조치는 현대증권과 현대자산운용 등 금융 계열사를 제외한 모든 계열사에 적용된다.
현대그룹과 채권단 간의 갈등은 지난 4월 채권단이 현대그룹을 재무약정 대상으로 선정한 이후로 날이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다. 지난해 현대상선 등 주력 계열사들이 적자를 기록한 점을 들어 채권단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는 재무약정 체결을 요구해온 것이다. 이에 현대 측은 채권단의 재무 약정을 이끈 외환은행을 겨냥해 “주거래은행 교체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외환은행과 거래를 끊고 주채권은행을 변경해 재무구조 평가를 다시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현대그룹이 강경 모드로 일관하자 결국 채권단은 여신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뽑아들면서 현대그룹의 자금줄 봉쇄에 나서기에 이르렀다.
채권단의 대출 만기 연장 중단 발표가 난 7월 29일 현대그룹은 보도자료를 통해 “재무약정은 자율적인 사적 계약으로 이에 협조할 의무가 없음에도 이를 지연한다고 채권단이 극단적인 제재를 내리는 것은 형평성을 잃은 과도한 조치”라고 밝혔다. 아울러 “채권단의 제재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덧붙였다.
현대그룹은 현재 1조 3000억 원 정도의 현금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올해 만기 도래하는 금융권 여신은 약 5000억 원. 금융권 제재 조치에도 당장은 그럭저럭 경영을 꾸려나갈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유 현금을 금융권 여신 상환에 사용하고 나면 추후 경영 활동 반경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업 신용등급 하락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그룹의 사활이 걸린 현대건설 인수전도 문제다. 금융권의 여신 회수로 자금 조달이 불투명해진 데다 신용등급 하락도 우려돼 현대건설 인수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재무약정을 받아들일 경우 여신 제재 조치를 중단할 것이란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재무약정을 받아들이는 즉시 현대그룹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거액을 끌어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이렇다 보니 증권가를 중심으로 현대그룹의 거액 유상증자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금융권으로부터 사실상 돈줄이 막힌 만큼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이 유상증자를 단행해 경영과 M&A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할 것이란 관측이다. 유상증자 규모는 올해 만기 도래하는 금융권 여신 액수인 5000억 원 수준일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유상증자가 단행될 경우 현대그룹 내에서 현대상선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20.60%)가 주목을 받게 된다. 현대엘리베이터 역시 지난해 적자를 기록했지만 올해 들어 흑자로 전환된 상태다. 자금 사정이 한결 나아진 현대엘리베이터가 최근 채권 발행 등을 통해 끌어들인 자금으로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유상증자설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소리”라고 밝혔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지금은 재무약정 대상 선정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응하는 데 주력할 시점”이라며 “유상증자 같은 이야기가 내부에서 나올 상황이 아니다”고 역설했다.
현대그룹 측이 극구 부인하고 있음에도 현대상선 유상증자설이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현정은 회장과 불편한 사이인 정몽준 의원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과의 관계 때문이다. 지난 2006년 4월부터 현대중공업 계열이 현대상선의 최대주주로 돼 있는 상태다.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15.30%를 갖고 있으며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이 6.84%를 보유해 현대중공업 계열 지분율은 총 22.14%에 이른다. 현대엘리베이터의 현대상선 지분율 20.60%보다 1.54%포인트 높은 수치다. 그밖에 현 회장과 경영권을 놓고 ‘시숙부의 난’을 벌였던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 계열도 현대상선 지분 4.27%를 갖고 있다.
▲ 현대상선 전경. |
만약 현대중공업이 증자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지난 4년간 지켜온 현대상선 최대주주 자리를 잃게 된다. 현 회장의 경영권을 압박할 여지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 경우 발생할 실권주를 현 회장 측이 경영권 안정을 위해 인수하려 들 수도 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자금 동원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알짜 계열사인 현대증권이 실권주 인수 주체로 나설 수도 있다. 지난해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등 주력 계열사들이 적자에 허덕일 때 현대증권은 영업이익 2552억 원, 당기순이익 1789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현대증권이 실권주 인수에 나설 경우 부당 지원 논란에 휩싸일 여지도 있어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지난 2006년 현대상선이 유상증자를 단행했을 때 현대중공업은 유상증자에 참여한 바 있다. 이번에도 유상증자가 실시될 경우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현대상선 유상증자설은 현대건설이 현대상선 지분 7.22%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현대건설이 현대상선 주요 주주인 점 때문에 “범 현대가에서 현대건설을 차지할 경우 현대상선 경영권 위협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대 측이 “유상증자는 없다”고 밝히는 가운데 현대가 향후 어떻게 자금을 조달할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대와 대립각을 세워온 범현대가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게 될지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