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발 떨어진 강만수와 바통터치?
▲ 백용호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왼쪽)과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
지난 7월 19∼21일 사이 ‘규제 완화’에서 ‘백지화’로 돌변하면서 부동산 관련 업계를 들었다 놨다 한 DTI 규제 완화 논란에 대해 한 정부 관계자가 내린 ‘정의’다. 한마디로 경제정책의 ‘키맨’이 강만수 특보에서 백용호 정책실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동안 이끌어온 경제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다. 굳이 번역하자면 ‘기업 친화적’이라고 할까. 이는 대통령 자신의 기업 경영 경험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론적 뼈대는 강만수 특보에게서 나왔다.
이에 따라 대기업의 투자환경 개선을 위한 각종 규제 철폐 및 법인세 감면, 고환율 정책 등이 추진됐다. 실제 금융위기 당시 막대한 재정정책과 자동차 세제 혜택 등 감세 정책이 쏟아졌다. 정권 초기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은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 이러한 경제정책 방향을 설명하며 대기업의 투자를 요청했다.
정권 중반까지 강만수 특보가 내세웠던 경제정책은 큰 효과를 거뒀다. 당장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사상최대 실적을 쏟아낸 것이다. 수출이 급증하면서 올해 상반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도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정도로 금융위기 속에서도 빠른 경제 회복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정책의 성과는 ‘딱 거기까지’였다. 정부정책 덕에 대기업의 실적은 올라갔지만 하청업체나 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정부는 대규모 실적을 올린 대기업들이 투자를 통해 고용과 밑바닥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대기업은 들어온 현금을 쌓아놓는 데 바빴다.
여기에 대기업들이 기업형슈퍼마켓(SSM)을 잇달아 출범시키면서 국내 자영업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규모 점포와 시장 상인들의 삶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대기업이 투자를 통해 공생하기보다 유통까지 침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의 몫까지 빼앗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속된 고환율 때문에 수입물가가 오르면서 서민 부담이 커졌다. 우리나라는 식량자급률이 낮다 보니 수입 물가 상승분이 고스란히 서민 가계에 부담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최근 이 대통령이 대기업에 대한 경고성 발언을 끊임없이 내놓고 서민 중심 경제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이 대통령의 경제정책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백용호 국세청장의 청와대 정책실장 임명이었다. 백 실장은 2008년 공정거래위원장을 맡을 때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정부 핵심인사다. 당시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와 하도급 서면계약문화 정착, 자율적 공정거래 협약 등을 추진했다.
특히 백 실장은 강 특보 못잖은 이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이며, 측근에 속한다. ‘대통령의 경제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핵심 브레인’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백 실장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광주 서중, 익산 남성고를 나와 중앙대와 뉴욕주립대를 졸업한 뒤 30세에 이화여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처럼 지연, 학연에서 거리가 먼 백 실장과 이 대통령이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6년 총선 당시 신한국당 공천으로 서울 서대문 을에 출마한 때부터다. 당시 인근 종로에 출마한 이 대통령과 만난 뒤 막역한 관계가 됐다.
이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내놓고 미국 연수를 떠나자 백 실장은 이 대통령이 만든 동아시아연구원의 2대 원장을 맡았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이 된 뒤에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청계천 복원과 뉴타운 개발을 지원했다. 대선 때는 캠프 정책 자문그룹인 바른정책연구원장으로 공약 개발에 매진했다. 정권 출범 뒤에는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국세청장을 맡아 가장 말 많고 탈 많은 조직인 국세청을 안정되게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세청장은 차관급이지만 당시 차관급 회의에서 다른 차관들도 백 실장에게만큼은 예의를 갖춰 대했다는 후문이다.
여권 주변에서 백 실장을 ‘정권 끝까지 함께할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러한 백 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하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친 서민정책 기조가 단순히 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고, 이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번 DTI 규제 완화 백지화와 대·중소기업 상생 전략 마련이다.
DTI 규제 완화에 대한 논란이 커진 지난 7월 20일 청와대 서별관에는 백 실장과 윤증현 재정부 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진동수 금융위원장, 최중경 경제수석이 모였다. 이날 회의에서 각 부처 간 논쟁을 정리한 사람이 바로 백 실장이었다고 한다. 백 실장은 “현 시점에서 DTI 규제 완화 논의 자체가 문제가 있다. 친 서민 기조와 맞지 않는다”고 제동을 걸었다. 이 발언으로 DTI 규제 완화는 없던 일이 됐고, 그 결과 백 실장 등 신임 청와대 참모진 임명 후 22일 처음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 안건은 부동산 활성화 대책에서 이 대통령의 미소금융 현장 방문으로 바뀌었다.
미소금융 현장 방문 이후 이 대통령의 대기업 경고 발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또 청와대 참모진이 백 실장을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발전 전략 마련에 착수한 사실도 알려졌다. 청와대라는 열차가 대기업, 수출기업 중심 정책이라는 강만수 특보의 노선에서 벗어나 대·중소기업 상생 및 친 서민정책이라는 ‘백용호 노선’으로 갈아탄 셈이다. 이를 반영하듯 29일 비상경제대책회의 안건도 ‘중소기업 현장조사 결과 및 향후 정책과제’로 결정되는 등 대통령의 중소기업 및 서민 행보가 연일 지속되고 있다.
친 서민으로 돌아선 덕분일까. 지난 28일 치른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과 충청에서 5석을 건지는 등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친 서민 기조로 전환되면서 경제 주무부처인 재정부는 8월 말 발표할 세재개편안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재정부 관계자는 “세제개편안에 친 서민 기조를 어떻게 반영해야할지 연구 중”이라면서 “서민층에게 걷는 세금이 크지 않아서 친 서민을 세금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또 부유층에게 혜택이 돌아갔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도 크다”고 토로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