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씨 “말조심해!” 버럭하다가 재판 땐 ‘꾸벅꾸벅’…광주지법 “5월 21일 헬기 사격 있었다”
광주지방법원 형사8단독(김정훈 부장판사)은 11월 30일 오후 1시 58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 씨에 대한 선고 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1980년 5월 21일(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500MD 헬기 사격이 있었다”며 전 씨의 사자명예훼손죄를 인정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말조심해!”
전두환 씨는 11월 30일 오전 8시 42분쯤 광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을 나섰다. 검은 양복을 입은 전 씨는 머리엔 검은 중절모를, 얼굴엔 하얀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수행원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던 전 씨는 현관문을 나온 뒤 그를 보러온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인파 속에 있던 유튜버와 시민들은 전 씨를 향해 “전두환! 이놈! 대국민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전두환 씨는 11월 30일 오전 8시 42분쯤 광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을 나섰다. 이내 인파 속에 있던 유튜버와 시민들은 전 씨를 향해 “전두환! 이놈! 대국민 사과하라!”고 소리쳤다. 전 씨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조심해, 이놈아!”라고 역정을 냈다. 사진=연합뉴스
전 씨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수행원이 차량 뒷문을 열자 아내 이순자 씨를 먼저 태운 뒤 잠시 멈춰서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조심해, 이놈아!”라고 역정을 냈다. 전 씨가 탄 차량은 오후 12시 27분쯤 광주지방법원 법정동에 도착했다. 전 씨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5·18 책임을 인정하지 않느냐’,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는 등을 물었지만 전 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2020년 4월 27일 법정에 출석했을 때 ‘발포 명령이 없었느냐’며 묻는 취재진에게 “이거, 왜 이래”라며 성질을 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전 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이 발단이 돼 법정에 서게 됐다. 전 씨는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지칭했다. 조비오 신부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 21일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에 조비오 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는 2017년 4월 27일 전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전 씨는 2018년 5월 3일 불구속기소 됐다.
2018년 8월 27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전 씨의 사자명예훼손 관련 재판은 결심 공판을 포함해 18차례 이어졌다. 총 34명의 증인이 법정에서 증언했다. 전 씨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했지만 법원 정기 인사로 재판부가 두 차례 바뀌면서 법정 출석 의무가 생겼고, 이에 두 번 법정에 출석했다.
#“헬기 사격 있었다” 인정
재판의 핵심 쟁점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여부로 맞춰졌다. 일반적으로 명예훼손죄는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성립할 수 있지만, 사자명예훼손죄는 허위 사실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 헬기 사격이 없었다면 조비오 신부의 목격담이 사실로 인정되지 않고, 이를 비난한 전 씨의 사자명예훼손죄가 성립하지는 않게 된다. 반면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전 씨는 죄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1980년 5월 21일(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500MD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전 씨의 사자명예훼손죄를 인정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사진=연합뉴스
11월 30일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선 전 씨는 청각보조장치를 쓰고 있었다. 전 씨 두 번째로 출석한 12차 공판에서 전 씨가 재판부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말한 데 따른 조치였다. 당시 아내 이 씨가 전 씨의 귀에 대고 재판부의 진술거부권 관련 설명을 대신 전해주기도 했다. 전 씨는 이날은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는 재판부의 질문에 “맞습니다”라고 또렷이 말했다.
재판부의 선고는 1시간쯤 지난 오후 3시에 끝났다. 선고가 길어지는 것을 고려해 재판부는 전 씨가 앉아서 공소사실을 듣도록 했다. 전 씨는 공소사실이 낭독되는 동안 꾸벅꾸벅 졸았다. 고개를 하늘로 향하기도 했다. 전 씨는 앞선 두 번의 공판에서도 조는 모습을 보였다.
재판부는 “1980년 5월 21일(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500MD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당시 전일빌딩에 남은 탄흔(당시 위에서 아래로 꽂힌 총알 흔적이 발견)이 결정적 증거였다. 전일빌딩은 10층 높이의 건물로 당시 광주 금남로 근처엔 10층 이상 건물이 없었다. 재판부는 전 씨의 사자명예훼손죄를 인정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앞서 이 사건 검사는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사자명예훼손죄를 범한 자는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집행유예로 전 씨는 구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 씨의 회고록이 발단이 돼 우리나라 군대가 우리나라 시민을 상대로 헬기 사격까지 가했다는 뼈아픈 역사가 40년 만에 인정된 순간이었다.
#전 씨의 알츠하이머 진단
유죄로 인정됐지만 집행유예가 나온 마당에 전두환 씨가 항소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전 씨는 회고록 출간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헬기 사격이 인정된 만큼 1980년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씨가 헬기 사격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기억을 잃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전 씨는 회고록 출간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헬기 사격이 인정된 만큼 1980년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씨가 헬기 사격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기억을 잃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사진=일요신문DB
전 씨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전 씨의 아내 이 씨는 남편 알츠하이머 원인을 두고 “2013년 검찰이 자택 압수수색을 벌이고 일가친척·친지들의 재산 압류 소동 후 기억상실증을 앓았는데 그 일이 있은 뒤 대학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증세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2013년 7월 16일 전 씨의 미납 추징금 집행과 은닉 재산 적발을 위해 전 씨의 자택 등 18곳을 압수수색했다.
다시 말해 전 씨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건 2013년 7월 이후인데, 전 씨는 2017년 4월 회고록을 냈다. 알츠하이머를 앓던 전 씨가 회고록을 낸 셈이다. 2018년 8월 광주지방법원 형사8단독 김호석 판사 또한 이 부분에 의문을 제기했다. 김호석 판사는 당시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알츠하이머를 2013년 전후로 앓았다고 하는데, 회고록은 2017년 4월 출간했다. 모순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때 전 씨의 변호인은 “증세가 더 악화하기 전에 준비하다 보니까 급하게 출간했다. 일부는 이전에 초본 작성한 부분 있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전 씨는 2019년 12월 12일 12·12 쿠데타 40주년을 기념해 그 주역들과 오찬을 갖거나, 2019년 11월 7일 강원도 홍천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이 포착되는 등 계속해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 맞느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