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 집터 매입 ‘정통성’ 세웠다
▲ 경제교류를 통한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09 밴 플리트상(Van Fleet Award)’을 수상한 정몽구 회장. |
현대·기아차그룹 계열 현대모비스는 지난 8월 3일 공시를 통해 자회사 아이에이치엘(IHL)의 지분 10%(1만 2000주)를 지난 7월 27일 주현 씨에게 매각했다고 밝혔다. 주 씨는 ‘왕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의 장녀 정은희 씨 남편이다.
이전까지 현대모비스는 IHL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번 거래를 통해 정은희 씨 남편이 IHL 대주주 반열에 올라서게 됐다. 공시에 따르면 주현 씨의 이번 IHL 주식 매입 금액은 주당 2만 8891원으로 총액 3억 4669만 2000원이다. 오너의 허락 없이 계열사 지배구조 변화가 어려운 만큼 재계에선 사실상 정몽구 회장이 조카 정은희 씨 부부에게 IHL 지분을 챙겨준 것으로 보고 있다.
IHL은 지난 1993년 설립된 자동차 부품용 램프 제조업체로 지난 2004년 4월 1일자로 현대·기아차그룹 계열회사로 편입됐다.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은 1173억 원이며 지난해 매출 1975억 원, 영업이익 23억 원, 당기순이익 28억 원을 각각 기록했다.
주현 씨는 지분 매입일인 지난 7월 27일 IHL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 평사원 시절인 1995년 정은희 씨와 결혼한 그는 동서산업 상무와 한때 현대차 계열이었던 에코플라스틱 부사장을 거쳐 지난 2007년 4월부터 이 회사 등기임원으로 재직해 왔다.
주현 대표가 지분 취득에 이어 경영권까지 얻게 된 것에 대해 재계에선 정몽구 회장의 ‘각별한 유족 챙기기’로 해석하고 있다. 1982년 정몽필 회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로 바로 아래 동생인 정몽구 회장이 맏형 노릇을 하면서 정은희-유희 자매에게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지난 1995년 결혼식 때 정은희 씨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선 것도 작은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이었다.
정은희 씨는 동생 정유희 씨와 더불어 왕회장이 생전에 끔찍이 아꼈던 손녀다. 우울증을 앓다가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정몽우 회장 유족에 대해서도 왕회장은 각별한 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정신영 씨는 왕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으로, 그 아들인 정몽혁 회장에 대한 왕회장의 애틋함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왕회장이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던 유족에게 정몽구 회장이 잇달아 기업 경영의 기회를 주는 것을 두고 재계에서는 왕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유족 챙기기 일환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과 정은희 씨 간의 각별한 삼촌-조카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 이번 IHL 지분 거래 말고도 최근에 또 있었다. 정은희 씨가 왕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울 청운동 5×-×3 소재 주택을 최근 정 회장에게 매각한 것이 <일요신문>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등기부에 기재된 명의 이전 날짜는 공교롭게도 IHL 지분 거래일과 같은 7월 27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청운동 5×번지 일대(5×-×3, 5×-×4, 5×-×5)에 집 세 채를 갖고 있었다. 지난 2001년 왕회장 사후 이 집들 중 가장 넓은 5×-×5 집은 정몽구 회장이 물려받았다. 5×-×4 집은 정일선 사장이 상속받았는데 이듬해 매각했고 정 사장은 현재 서울 청담동 소재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왕회장의 등기부상 주소지였던 5×-×3 주택은 정은희 씨에게로 상속됐다. 그런데 지난 7월 27일 정 회장이 이를 사들이면서 왕회장의 혼이 깃든 청운동 집 세 채 중 두 채가 정 회장 소유가 됐다. 등기부에 나온 거래액은 약 17억 원.
정 회장이 조카 남편을 계열사 대주주 및 대표이사로 만들어주면서 조카 명의로 돼 있던 왕회장 자택을 자기 소유로 한 것을 범현대가 맏형으로서 정통성을 드러내려는 의지로 볼 수 있을 법하다. 이는 최근 들어 재계와 금융권에 퍼지고 있는 ‘현대차를 중심으로 한 범현대가의 현대건설 인수 컨소시엄 구성 추진’ 소문과도 궤를 같이한다. 정 회장 동생인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왕회장 정통성 계승 등을 위해 현대건설 인수전에 팔을 걷어붙였지만 최근 채권은행으로부터 재무구조개선 약정 대상으로 선정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범현대가 내에서도 정몽구 회장이 중심이 돼서 현대건설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7월 21일 열린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정몽진 KCC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전과 관련해 “현대가의 컨소시엄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경제논리상 돈 많은 기업이 인수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정몽구 회장의 현대·기아차그룹을 중심으로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와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 등이 공동으로 현대건설을 인수해야 한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차 측은 “현대건설 인수 논의가 진행된 바 없다”는 입장이지만 현정은 회장이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서 재계와 금융권에선 정몽구 회장을 중심으로 한 범현대가의 현대건설 인수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정 회장의 남다른 유족 챙기기가 ‘현대 왕국 재건’과 맞물려 해석되는 가운데 정 회장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재계의 시선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 정몽구 회장의 차녀인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과 부부다. |
‘잘나가는 사위’ 분가 임박?
현대모비스의 최근 공시내역 중엔 정은희 씨 남편 주현 대표의 IHL 지분 매입 외에도 주목할 만한 주식 변동 사항이 있다. 지난 6월 30일 정몽구 회장 차녀인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과 남편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이 현대모비스가 보유 중이던 현대커머셜 지분 20%를 전량 매입한 것이다. 정명이 고문은 현대모비스로부터 현대커머셜 주식 266만 7000주를 197억 원에, 정태영 사장은 133만 3000주를 99억 원에 장외거래로 사들였다. 이전까지 정명이 고문의 현대커머셜 지분율은 20%(400만 주), 정태영 사장 지분율은 10%(200만 주)였는데 이번 거래를 통해 정 고문 지분율은 33.3%로, 정 사장 지분율은 16.7%로 뛰어올랐다. 나머지 지분 50%는 현대차가 보유하고 있다.
이번 지분 거래를 통해 그룹 내 금융부문에서의 정 사장 영향력이 더욱 확대된 것이란 평이 뒤를 따르고 있다. 한편으론 정태영 사장이 현대커머셜 대표이사도 겸직하고 있는 만큼 정몽구 회장이 분가를 염두에 두고 정태영-정명이 부부 몫을 챙겨주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는 정 회장 외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승계 전망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기아차 사장이던 지난해 8월 현대차 부회장으로 깜짝 승진한 데 이어 지난 3월 현대차 등기이사에 선임된 정 부회장은 사실상 ‘대관식’만 남겨놓은 상태로 평가받는다. 정의선 부회장의 승계를 위한 조치라는 평가 속에 재계에선 그동안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 온 정태영 사장과 정 부회장을 비교하는 시선도 많아졌다. 정태영 사장 부부의 현대커머셜 지분 추가 취득은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안정적 승계를 위해 정몽구 회장이 정태영 사장 분가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란 해석이 제기되는 것이다.
반면 정몽구 회장이 정의선 부회장 시대를 열어젖힐 조타수로 정태영 사장을 염두에 두고 그에 대한 힘 실어주기에 나선 것이란 분석도 공존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인사 소문이 나돌 때마다 “정 사장이 기획조정실로 옮겨 그룹 경영 중심에 설 것”이란 관측이 끊이지 않은 바 있다.
집 판 돈으로 ‘자존심’ 세울까
최근 최대주주 자리를 해외자본에 빼앗긴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보유 중이던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 두 채 중 한 채를 지난해 매각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눈길을 끌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삼성동 아이파크는 국내 최고가 아파트로 잘 알려져 있다. 정 회장은 지난 2001년 분양 때부터 삼성동 아이파크 사우스윙동 250×호(전유면적 157㎡·약 48평)를 갖고 있었으며 지난해 4월 이스트윙동 20×호(전유면적 175㎡·약 53평)를 32억 원에 사들였다. 그런데 지난해 8월 28일, 분양 때부터 보유해온 사우스윙동 250×호를 매각한 것이다. 등기부에 기재된 매각 금액은 33억 원.
정 회장의 국내 최고가 아파트 매각이 뒤늦게 관심을 끄는 것은 최근 최대주주 자리를 해외자본에 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산업개발은 최근 공시를 통해 지난 7월 12일자로 최대주주가 정 회장에서 싱가포르계 자본인 템플턴자산운용(템플턴)으로 변경됐음을 알렸다. 템플턴의 현대산업개발 지분율은 현재 17.43%로 정몽규 회장 개인 지분 13.39%를 포함한 정 회장 측 지분율 17.06%보다 0.37%포인트 높다.
현대산업개발 측은 “템플턴이 (정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할 우려는 없다”고 밝히지만 정 회장의 자존심이 꽤나 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정 회장이 국내 최고가 아파트를 판 돈으로 자존심 회복을 위한 지분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이다.
정 회장은 삼성동 아이파크 매각 8개월 후인 지난 4월 현대산업개발 지분을 추가 매입했다. 정 회장의 추가 지분 매입은 지난 2005년 8월 이후 4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정 회장은 지난 4월 30일 1만 8500주를 주당 2만 8391원에, 5월 3일 1만 7000주를 2만 7612원에 각각 사들였다. 당시 지분 매입에 총 10억 원을 들였던 정 회장은 개인 지분율을 종전의 13.34%에서 13.39%로 0.05%포인트 올렸다. 여기엔 정 회장의 삼성동 아이파크 매각 대금 중 일부가 쓰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최대주주 자리를 빼앗긴 정 회장이 삼성동 아이파크 매각 대금 중 그동안의 지분 매입비용 10억 원을 뺀 22억 원으로 추가 매입할 수 있는 현대산업개발 지분은 0.11% 정도다. 0.11% 지분율을 높인다 해도 정 회장 측 지분율이 17.17%에 머물러 템플턴 지분율(17.43%)에는 미치지 못한다.
현대산업개발 측은 템플턴과의 우호적 관계를 자신하고 있지만 템플턴은 그동안 주요 주주로 참여해온 국내 회사들의 경영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절치부심하고 있을 정 회장이 자존심 회복을 위해 추가로 돈을 끌어와 지분 매입에 나설지, 아니면 템플턴이 경영권을 위협하지 않는 것을 담보로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할지 재계의 관심은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