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목적 기준 모호, 법관 따라 판결 달라…헌재 공개변론 시작, 폐지 안돼도 ‘제한적 적용’ 가능성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그런데 작성한 글이 허위가 아닌 사실일지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은 진실을 말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사회적 평판을 훼손하는 내용이면 명예훼손죄로 처벌한다. 다만 공익 목적이 있을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지만 공익이 주된 목적인지, 비방의 목적이 주된 목적이었는지에 대한 판단 역시 법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모호한 기준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 모습. 사진=고성준 기자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A 회사 직원이 임금을 체불하고 단체교섭에 성실히 임하지 않는 사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몇몇 직원들과 함께 모였다. 이들은 “A 회사 사장은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내용의 현수막과 피켓을 들었다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B 씨는 제약회사 대리점 갑질을 고발했다가 정황상 공익적 목적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실을 말해도 공익적 목적 인정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공개변론을 열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위헌인지에 대한 찬반 의견을 듣기 시작하면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손지원 오픈넷 변호사는 “헌재가 공개변론을 열었다는 것은 배드파더스나 미투 운동과 같이 실제 있었던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행위가 사회적 효용이 있고 이런 행위가 형사처벌 돼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여 위헌성을 집중 검토해보겠다는 뜻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20년 디지털교도소가 과거 성범죄자 등을 온라인에 공개하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면 사실을 알리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했지만 반대하는 측에서는 ‘심각한 인격권 침해’라고 맞섰다. 9월 10일 헌재 공개변론에서도 법무부 측 참고인 홍영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디지털교도소가 얼굴을 공개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다 숨진 대학생 사례를 언급했다. 홍 교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비범죄화 되면 이런 사례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손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인격권, 체면을 존중하는 문화가 강해 위헌 결정이 안 나올 가능성도 있지만, 변화된 사회적 인식과 국제사회 권고 등을 반영해서 헌재가 전향적인 판단을 내려주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폐지냐 아니냐 기로에 놓여 있다. 폐지가 안되더라도 개정 가능성이 열려 있어 이번엔 사라질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애초부터 없거나 폐지가 되는 흐름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적용되는 나라가 손에 꼽을 정도다. 주요 국가 중에서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등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있지만 성립요건을 제한한다. 이 법이 있는 나라 대부분은 진실한 사실이거나 피의자가 진실로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명예훼손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2015년 유엔 자유권 규약 위원회와 2011년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대한민국 정부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정식으로 권고한 바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인해 언론계에서도 유독물질이 나온 식품, 화학제품, 비위생적 식당, 의료사고가 난 병원 등에 대한 보도에서 익명 보도가 원칙이 되기도 해 불만이 많았다. 한 방송사 기자는 “유권기관의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익명으로 보도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이 법 때문에 익명으로 보도하면 오히려 ‘그 업체를 감싸주느냐’는 악플을 받는다”고 말했다.
수사기관에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를 찬성하는 분위기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수사기관 담당자들을 만나보면 댓글, 업체 리뷰 등 범죄라고 하기 어려운 일을 수사하는 데 시간 쓰는 걸 반겨하지 않는다. 다만 변호사들은 이 법으로 큰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어 모두 찬성하진 않는 분위기다”라고 귀띔했다.
공개변론을 진행하고 있는 헌재에서 위헌 판단이 나오지 않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사라질 수 있는 길은 있다. 국회에서도 이 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측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타인의 사생활 비밀을 침해하는 경우에만 적용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준비 중이다. 이 의원 측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각종 사회 고발 및 언론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있지만 사생활 보호라는 우려도 있는 만큼 이를 절충해 비밀 침해에만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적용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변호사인 최초롱 화난사람들 대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진실을 알리고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축시킨다. 뿐만 아니라 피해사실을 알린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고소당함으로써 또 다른 고통을 입는 부작용도 적지 않게 발생한다”면서 “공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든 사생활에 속하는 것이든 불문하고 사실을 알리는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