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한 민간요법 등장, 서양에선 신의 징벌 여기기도…향후 팬데믹 뺨치는 ‘인포데믹’ 경계해야
1920년 인천, 콜레라 방역을 위해 일제 위생 경찰이 주민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사진=국가기록원
전염병 예방과 치료는 과거 조선시대에도 국정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태조는 1392년 조선을 건립하면서 동서활인서를 설치했다. 동서활인서는 동활인서와 서활인서로 나뉘어 전염병에 걸린 백성들을 격리하고 치료하던 곳이다. 세종은 1434년 전국에 전염병이 돌자 처방문을 일일이 써서 전국에 보냈다. “내가 의서에 써있는 처방과 약방을 뽑아 적어 내린다. 수령들이 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고 정성껏 치료해줘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마라.” 세종실록에 남은 기록이다. 기상천외한 요법이 등장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와 밤에 자리에 누울 때 참기름을 코에 바른다든지, 발효시킨 콩 씨와 불기운 받은 아궁이 흙, 어린이 소변을 섞어 마시는 요법도 있다.
‘전염병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한 왕도 있었다. 중종은 ‘간이벽온방’이라는 책을 냈고, 광해군은 어의인 허준을 시켜 1613년 2월 ‘신찬벽온방’을 편찬했다. 신찬벽온방에선 역병이 돌면 고을을 봉쇄하고 환자들의 옷을 태우거나 시신이나 집을 태우라고 안내했다. 역병으로 가족을 잃은 이에게 세금을 면해주기도 했다. 현대의 방역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은 전염병이 왕의 덕이 부족해 발생한 재앙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세종은 운이 좋았다. 통치 기간 중 전염병 창궐 횟수가 5회로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1392년부터 1917년까지 500여 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전염병 발병 햇수를 따지면 320년에 달하고 연평균 2.73회 발생했다는 연구도 있다. 숙종 때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 때 19회로 그 뒤를 잇는다. 영조는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 수를 월별로 기록해두기도 했다. ‘영조실록’을 보면 1750년 1월부터 9월까지 총 22만 3578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 뒤 기록은 없다.
광해군이 1613년 어의인 허준을 시켜 발간한 신찬벽온방, ‘전염병 매뉴얼’이 담긴 책이다. 사진=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
지금도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한다. 과거엔 전염병에 걸리면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원인을 알지 못했던 과거 사람들은 민간요법과 무속신앙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문종은 1451년 역병을 일으키는 원귀를 달래기 위해 ‘여제단’을 설치하기도 했다.
1821년 8월 순조 때 처음 발생했던 ‘괴질’은 백성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실록에 나온 1819년 12월 인구수와 1822년 12월 인구수를 비교했을 때 4만 2000여 명이 감소했다. 최소 4만 명 이상 사망한 셈인데, 물론 이때 인구수 통계는 호적에 등재된 사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불완전했다.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에선 당시 괴질로 도성에서 죽은 사람만 13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괴질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콜레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쥐가 콜레라를 옮긴다고 믿어 ‘쥐병’이라 부르기도 했다. 콜레라를 막기 위해서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그림으로 그려서 대문에 붙여 두기도 했다. 1888년에 조선을 여행하던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가 자신의 책 ‘조선기행’에 담은 내용이다.
근대에 들어서도 전염병에 대항하는 민간요법은 계속됐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사진으로 보는 서울’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일제강점기 조선 백성들은 말라리아 환자에게 우체국 직인이 찍힌 우표나 엽서를 태워 그 재를 냉수에 타서 먹이거나 환자 등에 우표 석 장을 붙였다. 관청의 힘이 전염병보다 무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24년 독감이 유행하자 일본 순사의 이름이나 조선 총독의 이름을 써서 이마에 붙이기도 했다. 이 또한 조선 총독부가 전염병보다 무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12년 평안북도 초산 보변루 앞에서 굿하는 무녀. 여러 시대와 장소에 걸쳐 사람들은 전염병을 절대적인 존재의 징벌로 여겼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처방이 꼭 조선시대나 한반도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1347년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메시나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때 등장했던 민간요법은 조선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포도주 마시기, 에메랄드 부숴 먹기, 환자 쳐다보지 않기 등은 그나마 평범한 수준이다. 미국의 작가 제니퍼 라이트가 쓴 책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를 보면 고름 마시기, 대변으로 찜질하기 등의 방법도 있었다. 또 환자의 부어오른 가래톳(허벅다리 윗부분의 림프절이 부어 생긴 멍울)에 개구리를 올려놓고 독을 빨아들이게 한 뒤 터져 죽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고 한다.
여러 시대와 여러 장소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을 신의 징벌로 여겼다. 1918년 스페인독감이 창궐할 당시 스페인 서부에 위치한 도시 사모라(Zamora)의 주교 역시 독감을 극복하기 위해선 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빌라 샤이크와 데이비드 헤이만이 쓴 ‘근대의 전염병(A modern plague)’에 따르면 사모라의 주교는 보건 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사모라 시가 스페인에서 최고의 사망률을 기록했다. 1918년 10월쯤엔 관을 짤 나무를 구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염병과의 싸움은 무지와의 싸움이었다.
최초의 방역 개념이 탄생한 곳으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꼽힌다. 흑사병 피해를 보던 당시 정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느낀 뒤였다. 박흥식 서울대 교수의 논문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에 따르면 1377년 흑사병 창궐 지역에서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사람은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라구사라는 지역에서 30일 동안 머물러야 했다. 나중엔 격리 기간이 40일로 연장됐다. 당시의 격리 기간 40일(quaranta)은 방역(quarantine)이라는 말의 어원이 됐다. 굳이 40일로 선택된 배경엔 40일이 기독교에서 각별히 의미를 가진 숫자였기 때문이다.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 주의 미 육군 훈련소에서 스페인독감에 걸린 병사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스페인독감은 1918년 봄 1차 유행, 그해 가을과 겨울 2차 유행, 이듬해 봄 3차 유행했다. 스페인독감으로 5000만 명이 숨졌는데 대다수가 2차 유행 때 목숨을 잃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근대의 역학 조사 개념을 탄생시킨 사건은 영국의 콜레라 사태다. 그 중심엔 영국의 마취 의사였던 존 스노우 박사가 있다. 그는 1854년 런던에서 창궐한 콜레라가 오염된 물을 타고 전파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스노우 박사는 런던의 수도관 지도를 작성해 오염원을 찾았고, 한 우물의 급수 펌프 손잡이를 제거해 콜레라 확산을 막았다. 당시는 오염된 공기가 질병을 전파한다는 ‘독기론’이 우세할 때였는데, 스노우 박사는 현장 조사를 펼쳐 콜레라가 수인성 전염병이라는 걸 증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전염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한 인물은 지석영이다. 1879년 전국에 천연두가 창궐해 수많은 어린아이가 죽어 나가고 있었다. 지석영은 일본 해군이 부산에 세운 제생의원을 찾아가 두 달 동안 종두법을 배웠다. 이곳에서 두묘(소 몸에서 뽑아낸 고름)를 얻어와 서울로 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려 두 살배기 처남에게 처음 접종을 시도했다. 첫 천연두 예방접종이었다. 그 뒤 마을 아이들 40명에게 종두를 해 안정성을 확인했다. 종두법을 처음 소개한 건 정약용이었지만 이를 처음 활용한 건 지석영이었다.
전염병 예방과 관련한 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건 1915년 일제가 제정한 ‘감염병예방령’이다. 콜레라, 홍역,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페스트 등 당시 우선적인 관리가 필요했던 9종을 전염병으로 정의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부는 상하수도 등의 시설 개선보다는 강제 격리 같은 수단을 동원했다.
과거엔 위생 상태와 관련된 수인성 전염병이 유행했지만 최근엔 호흡기 전염병이 주를 이룬다. 2002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2009년 신종플루엔자, 2012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호흡기 전염병 창궐 주기가 짧고 그 전파력도 강하다.
1950년 천연두 예방접종 주사를 맞고 있는 아이. 사진=국가기록원
의술과 기술의 발전으로 전염병을 퇴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세기 수많은 과학자가 전염병이 퇴치됐다고, 또는 곧 퇴치될 거라고 낙관했다. 이런 낙관은 1985년 에이즈(AIDS) 발병으로 곧바로 사라졌다. 에이즈는 300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만들었다. 퇴치는커녕 전염병 팬데믹(Pandemic·대유행)은 지금도 우리를 덮치고 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또한 전염병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두 가지 속성 때문이다. 첫째, 전염병은 교류와 번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인류가 발전하고 지구가 사람들로 빽빽해지면서 전염병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 둘째, 인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전염병에 고통받았지만 결국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갔다.
장문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에서 발행한 ‘코로나19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서 “한마디로 풍요함이 인구 급증을 낳고,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사회를 전염병에 취약하게 만들어 사회적 해체를 낳는다. 요컨대 역병은 거대한 역사적 변동의 통합적 일부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불행한 것은 그런 전염병의 역사가 철저히 망각되었고, 중세 흑사병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례가 역사책들에서 누락되었다. 그런 점에서 전염병의 역사는 인간의 오만을 기록해 둔 책”이라고 말했다.
1919년 황해도 경이포, 콜레라 환자 임시 격리 병사,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위생 경찰. 사진=건강보험심사평가원 블로그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 이후 또 다른 전염병이 찾아왔을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할까. 주의해야 할 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이 인포데믹(Infodemic·정보전염병)이다. 가짜뉴스를 잘 판가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무지와 ‘의도된’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과거 전염병에 대한 대응 사례는 대부분 무지에서 발생한 촌극이었다.
스페인독감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스페인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된 독감이 아니다. 스페인독감으로 명명되기 전부터 유행했다. 1918년 9월 필라델피아 인근 해군 기지에서 독감이 퍼졌다. 시 당국은 위험을 인지했으면서도 9월 28일 예정됐던 전시 공재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그 결과 10월 한 달 동안 1만 1000여 명이 독감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정직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10월 15일 ‘과학적 간호로 유행병 멈췄다’를 기사 제목으로 뽑았다. 이후 전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 독감의 실상이 그대로 보도되면서, 스페인독감으로 명명됐다.
박찬병 서울서북시립병원장는 초기 의사소통을 중요한 점으로 꼽았다. 박찬병 원장은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과의 초기 의사소통에서 아쉬운 점을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젊은 사람은 괜찮다’는 인식을 계속해서 준 면이 있다”며 “코로나19로 발생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참 많다. 나는 괜찮을 수 있지만 나로 인해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