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해결’ 경찰관 5명 특별승진…30년 지난 현재 기록 없고 증언해 줄 사람도 없어
재심 재판에서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인권의 최후의 보루인 국가 공권력과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8차 사건에서 원칙과 절차, 신뢰를 배신하고 잔인한 비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 내야 했다. 결과적으로 진실 규명은 완성되지 않았다. 누가, 언제, 어떻게 비밀을 만들었는지는 확인됐지만 이들이 ‘왜’ 증거를 조작했는지에 대해선 마지막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일요신문은 재판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추측의 영역에 남아있는, 그래서 이제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의 흔적들을 좇았다. 30년 전 경찰 수사기록과 2019년 검찰 재조사 기록, 전·현직 경찰 관계자들 및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경찰과 국과수 관계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 당시 경찰과 국과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구성했다.
과거 이춘재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가 당시 화성군 농수로에서 유류품을 찾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위기의 경찰
“(범인을) 검거도 해야 하고,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아주 곤란한 입장에 있었습니다.”(8차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 진술조서, 2019년 12월 11일 수원지방검찰청)
1988년 9월 16일 오전 7시,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의 한 가정집에서 13세 박 아무개 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인근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 아무개 씨가 블라우스로 양손이 결박된 채 발견(7차 사건)된 지 불과 9일 만에 발생한 살인 사건이었다.
당시 경기도경찰국(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1986년 9월부터 시작된 살인 사건이 2년 사이 8건으로 늘어났는데도 범인의 윤곽조차 그려내지 못했다. 오히려 ‘유력 용의자’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강압 수사, 증거불충분 등의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주민들과 언론으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아 내야 했다.
8차 사건이 발생한 직후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 일부가 B형으로 ‘반응’한다는 감정 결과 외에,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주변 탐문 수사가 전부였다. 2인 1조로 구성된 경찰관들이 B형 대상자들과 특히 이 가운데 품행이 좋지 못하거나 우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집중 조사하고 ‘특별 호구 조사’라는 이름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목격자를 찾는 식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 내부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 11월 14일, 8차 사건 수사본부가 화성경찰서장과 수사과장 등 수사 지휘부를 전면 교체하는 동시에 특진을 내걸면서 범인 검거 의지를 높였음에도 일선 경찰관들의 사기는 떨어지기만 했다. 지지부진한 연쇄 살인사건 수사에 대한 피로감과 강도 높은 비난에 지친 베테랑 경찰관들이 부서를 옮기거나 경찰을 아예 그만두면서 현장을 떠났다. 교체와 보강 끝에 재정비된 8차 사건 수사팀은 순경과 경장 등 막내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8차 사건을 수사한 당시 경찰관 장 아무개 씨의 2019.12.11.자 검찰 진술조서 일부. 수사본부 지휘부가 문책성 인사로 교체 됐고, 사건을 둘러싸고 곤란한 입장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사진=수사기록
그런데 두 달 뒤인 1989년 1월 31일, 8차 사건 수사는 전환점을 맞는다. 경찰과 국과수가 범인 확인 작업에 ‘방사선 동위원소 감정법’을 도입하기로 했다. 시료에 방사선을 쪼여 칼슘, 마그네슘, 티타늄 등의 성분 함량을 측정하고, 다른 시료와 비교해 비슷한 함량을 가진 것을 찾는 방법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었던 감정법으로, 검증조차 안 됐지만 당시 경찰은 방대한 수사 범위를 크게 좁힐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시료는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와 ‘용의자’들로부터 채취한 음모들을 사용하기로 했다. 경찰은 이후 사건 현장 인근에 살고 있던 남성들의 음모를 임의제출 방식으로 대거 수거하기 시작했다.
#윤성여 씨와 최 형사
1989년 4월 8일을 기점으로 수사기록엔 두 인물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윤성여 씨와 최 아무개 순경이다. 최 순경은 재심 재판이 끝난 지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른 지역에서 대공수사를 하다가 앞서의 8차 사건 수사팀 재정비 당시 합류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윤 씨의 최초 자백을 받아낸다.
최 순경은 4월 8일 윤 씨가 일하던 농기구 수리센터를 처음으로 방문해 음모를 제출 받아 수사보고서를 썼다. 분석은 곧바로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수사본부 관리반이 경찰관들이 수거해온 음모와 보고서를 취합해 한꺼번에 국과수에 분석 의뢰를 보내는 구조라 늦었다고 당시 경찰관은 진술했다.
그 사이 최 순경은 수사기록을 들고 자신이 대학 시절 수업을 들었던 식품가공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수사기록을 보면, 그는 1989년 5월 4일 교수와의 면담에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를 찾고 있는데,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한 음모에서 특정 원소들의(티타늄, 나트륨, 염소 등) 수치가 높아 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을 물었다. 교수는 “티타늄이 높게 검출된 것은 환경적 요인으로 볼 수 있고, 나트륨과 염소가 보통 사람보다 다량 검출된 것은 잘 씻지 않는 자이거나 감식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판정된다”는 의견을 전했다.
최 순경은 교수와의 면담 보고서에 “학계에 보고된 바 없고, 자료도 부족하다는 소견임”이라는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티타늄 성분이 자주 나올 만한 환경인 공장과 수리센터 등을 집중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총 47명의 음모를 다시 채취했고, 1989년 5월 9일 국과수에 의뢰했다.
같은 해 6월 20일, 국과수는 윤성여 씨 혈액형이 B형이고 음모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모양이 유사하다는 감정결과를 경찰에 보낸다. 그리고 한 달여 뒤인 7월 14일, 다시 국과수로부터 ‘음모 유사자 윤성여의 음모가 방사선동위원소 분석 결과 범인의 음모와 동일하다’는 내용의 감정 결과가 경찰에 ‘유선’으로 통보됐다.
경찰은 이날 윤 씨를 8차 사건의 용의자로 특정하고 윤 씨 주변을 맴돌았다. 이미 그가 일하던 농기구센터에 자주 찾아가 동향을 살펴왔지만, 국과수의 유선 통보 이후부턴 노골적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1989년 7월 15일부터 작성된 수사기록엔 윤 씨의 친인척 및 친구 관계, 성장과정 및 학력, 범죄경력 조사, 성격과 음주 여부, 성생활 관계 등에 대한 조사 보고서와 미행 과정에서 찍은 사진 등이 빼곡히 담겨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윤 씨의 음모만을 별도로 제출받아 국과수에 감정을 한 번 더 의뢰했고, 7월 24일 두 쪽짜리 감정서를 받는다. 이 감정서는 이후 윤 씨 유죄 판결의 핵심 증거가 된다. 감정서를 받은 다음날 밤, 경찰은 윤 씨를 경찰서에 데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 씨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8차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촬영한 윤성여 씨 미행 사진. 수사기록에도 미행 보고서가 첨부돼 있다. 사진=수사기록
#“국과수 감정서 전적으로 신뢰했다”
8차 사건을 수사한 경찰관들은 재심 재판과 2019년 검찰 재조사 과정에서 모두 “당시 국과수 감정 결과를 신뢰했다”고 말했다. 국과수가 윤 씨의 음모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가 같다고 판단했고, 감정 결과를 근거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취지였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윤 씨가 범행 현장에 침입하기 위해 담을 넘거나 책상을 넘어가기 쉽지 않았던 점 등 윤 씨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정황들을 무시한 이유도 모두 “국과수 감정 결과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심 법원은 윤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국과수 감정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다. 판단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내용에 오류와 모순점이 있다는 이유였다. 2019년 수원지검 재조사 결과에 따르면, 1989년 2월 4일부터 6월 23일까지 총 8건의 국과수 감정서는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증1호) 분석값이 모두 동일했지만, 유죄 핵심 증거였던 7월 24일자 감정서 속 사건 현장 음모 분석값은 앞서의 감정서들과 전혀 다른 수치가 적혀 있었다.
비교 대상이었던 윤 씨의 음모도 다른 용의자의 음모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과 관계없는 두 음모들의 성분 수치들마저도 조작됐다. 편차가 크게 나면 큰 수치는 낮추고 낮은 수치는 높이는 식으로 비슷하게 만들었다. 당시 부족했던 기술, 또는 감정인 개인의 ‘실수’로 보기 어려운 내용이다.
국과수 감정서는 당시에도 윤 씨가 범인이라는 점을 입증할 핵심 증거로 통했다. 수사 기관이 제대로 검토하는 일은 필수였다. 감정서 속 수치가 제각각이었던 점은 당시 수사 과정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재심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단도 이 점을 집중 추궁했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윤 씨를 상대로 수사하고 자백을 받아 사건을 검찰에 넘길 때까지 직접 국과수 감정서를 본 적이 없고,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선 경찰관들의 팀장 역할을 했던 형사계장은 국과수 감정서를 보긴 했지만, 성분 수치 등은 확인하지 않고 “동일인으로 사료됨”이라는 문구만 보고 수사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에 대해 수사가 전적으로 수사본부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열린 회의에서 수사 방향과 방식이 정해졌고, 일선 경찰관들은 지시에 따르기만 했다고 증언했다. 1988년 11월 지휘부 교체와 수사팀 재정비, 방사선동위원소 감정법 도입 등의 작업도 모두 수사본부에서 결정돼, 결정 배경과 과정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했다.
과거 8차 사건 수사 경찰관들인 수사가 전적으로 수사본부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수사 경찰관 심 아무개 씨 진술조서, 2019년 12월 수원지방검찰청. 사진=수사기록
이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려면 교체된 지휘부와 국과수 감정인 등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 8차 사건 속 ‘왜’라는 질문의 답은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일선 경찰들이 8차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고 지목한 수사과장 유 아무개 씨는 201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현재 귀국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2019년 12월 검찰에 밝혔다. 이메일을 통한 서면 조사가 이뤄졌지만 그는 대부분의 검찰 질의에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고 답했다.
8차 사건 수사팀 재편성 당시 ‘알 수 없는 이유’로 옮겨와, 첫 살인 사건 발생 후 2년 동안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던 ‘범인 검거’를 이끌어낸 ‘주공(8차 사건 경찰관들은 주요 공로자를 이렇게 불렀다)’ 최 순경은 이미 오래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의 파트너로 방사선 동위원소 분석법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당시 국과수 감정인 장 아무개 씨는 현재 고령에 뇌질환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답을 들을 수 없는 이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미룰 수는 없다. 당시 수사 경찰관들은 윤 씨 체포 이후 그의 자백과 진술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윤 씨가 담과 책상을 넘기 어렵다는 등의 범인이 아닐 수 있는 정황들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무시했다. 윤 씨 친척과 지인, 심지어 피해자 가족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조서에 넣거나 사건 발생 직후 나온 진술을 교묘히 바꾼 사실 등도 드러났다. ‘감정서를 전적으로 신뢰해 범인으로 확신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행위들이다.
수사 경찰관들은 재심 법정과 검찰 재조사 과정에서 이 지적에 대해 일제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심 법정에서 윤 씨에게 유일하게 사과했던 경찰관마저도 “수사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다면 잘못된 것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침묵의 카르텔
‘왜’라는 질문은 8차 사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드러난 사건으로 이어진다. 윤 씨가 검거되고 5개월이 지난 1989년 12월 21일, 태안읍 병점5리의 한 야산에서 같은 해 7월 실종된 초등학생의 치마와 책가방이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단순 실종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2019년 이춘재는 이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고,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이춘재 사건 수사본부는 과거 수사 경찰이 그날 초등생의 유류품과 함께 시신 일부까지 발견했음에도 알리지 않고 고의로 숨겼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 참여한 경찰관 가운데 한 명은 8차 사건에서 일선 경찰서의 팀장 역할을 맡았던 앞서의 형사계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9년 11월 1일 1일 경기도 화성시 A공원에서 경찰이 지표투과레이더 등 장비를 이용해 이춘재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의 유골을 수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기남부청 이춘재 사건 수사본부는 형사계장 등 경찰관 2명을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등 혐의로 입건했다. 다만 공소시효가 지나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유가족들은 진상이라도 알고 싶다며 2020년 3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첫 재판도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앞서의 형사계장은 8차 사건 재심 법정에서 초등생 실종 사건 질문에 “금시초문이다. 경찰(경기남부청 이춘재 사건 수사본부)이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고 답했다.
8차 사건과 마찬가지로, 초등생 실종 사건 속에서도 ‘왜’라는 질문의 답은 추측의 영역에 남아있다. 다만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있다. 초등생의 시신이 발견되기 두 달 전인 1989년 10월 11일, 8차 사건을 해결한 화성경찰서 소속 경찰관 5명이 특별승진했다. 8차 사건 발생 1년, 연쇄살인 발생 2년 만에 ‘쾌거’를 거둔 당시 경찰은 초등생의 시신이 발견된 시점까지 언론에 그 성과가 대서특필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