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후련하다” 동창 “춘재가? 아직도 안 믿겨”…경찰 강압수사 악몽 여전
2020년 11월 2일, 이춘재는 이춘재연쇄살인사건 8차 사건의 재심 공판 증인으로 수원지방법원 법정에 섰다. 이춘재는 시종 담담하게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2020년 11월 2일 이춘재는 한 법정에 섰다. 그리곤 자신의 입으로 모든 걸 털어놨다. 이춘재는 담담했다. 경찰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자백했다고 하기엔 진술은 구체적이었다. 검사와 변호사, 판사가 모르는 부분을 덧붙여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가 범인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화성이라는 도시에 ‘살인의 도시’라는 오명을 선사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 진실의 퍼즐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이제 이춘재연쇄살인사건으로 불린다. 2020년이 지나간다. ‘살인의 도시’라는 오명 또한 화성을 떠나간다. 이춘재연쇄살인사건을 꼬박 1년 4개월을 심층 취재해 온 일요신문은 12월 15일 마지막으로 화성을 찾았다.
#“후련하지...”
화성 주민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다. ‘후련하다’ 혹은 ‘관심 없다’였다. 그 당시의 사단을 기억하던 사람은 전자고, 당시에 화성에 없었던 사람은 후자였다. 현재 화성시는 그 당시 화성군에 없었던 사람이 더 많이 사는 도시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가는 가운데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에겐 이춘재연쇄살인사건은 일생에 남다른 의미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픈 기억이었다.
이춘재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장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과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황계리 논의 2019년 가을 풍경. 사건 피해자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위치에 쌓여있던 볏짚 더미에서 발견됐다. 사진=최준필 기자
“아무래도 후련하지, 근데 후련하다고 하기보다는….” 화성에서 60년을 넘게 살아온 A 씨는 미간을 구겼다. ‘후련하다’보다 더 마땅한 단어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말은 없다는 듯 A 씨는 말했다. “그때 여기 몇 집 없었어. 다 논밭이고 집은 띄엄띄엄 있었어. 서로 다 알고 지내고 그랬지. 근데 여기서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나오니 누가 그럴 수 있나 이상하긴 했지. 이제야 정확히 안 거지 뭐. 그러니까 이제 생각을 안 하고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거야.”
2019년 9월 일요신문과 이야기를 나눴던 여성 B 씨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연쇄 살인이 시작되던 해인 1986년 27세 나이로 화성에 시집왔다. 빨간 옷을 입으면 다 죽는다는 소문에 빨간 옷은 입지 않았고 낮이라도 시장에 혼자 장 보러 가는 법이 없었다. B 씨는 “이제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화성에 몇 없어. 죽거나 이사하거나 했지. 다 밝혀진 만큼 이제 그 사건이 자연스럽게 잊히면 좋겠어.”
6차 사건 피해자가 발견된 야산은 흔적도 없이 깎였고, 그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섰다. 2019년 가을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토박이 C 씨는 9차 사건(1990년 11월 15일) 때 용의자로 몰려 호되게 고생했다. 사건 발생 시점에 수원역 근처 모텔에서 잠을 청했는데, 당시 ‘숙박 확인증’을 깜박한 게 화근이었다. 사흘 동안 경찰에 붙들려 수사를 받고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받았다. 2019년 9월 당시 그는 이춘재의 이번 자백도 경찰의 강압에 의해 이뤄진 것 아니냐며 “직접 말하기 전엔 못 믿겠다. 기다려 봐야지”라고 의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아직도 안 믿겨. 어떻게 걔가 그랬는지.” C 씨는 이춘재의 연쇄 살인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C 씨는 이춘재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살던 동네도 같다. 나이가 다르지만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였다. 당시 이춘재는 겉보기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춘재가 법정 증언한 뒤로 ‘그 사건’을 더 쉬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춘재는 태안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녔다. 그의 가족은 30년 전과 같은 장소에서 살고 있다. 그와 학연으로 혹은 친인척 인연으로 엮인 사람들은 전보다 ‘그 사건’ 언급을 더 조심한다고 했다.
#남겨진 사람들
이춘재 가족이 화성을 떠났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다. 이춘재가 살던 집은 허물어졌고 그곳에 원룸촌과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 아파트에 이춘재 가족은 다시 입주했다. 한국 사회에서 연좌제는 사라졌지만, 이춘재의 엄마와 동생은 스스로 외부 접촉을 줄였다. 동네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아파트 노인정 회장이었던 이춘재의 엄마는 회장을 그만두고 노인정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끔 마트에 다니는 정도다. 그의 동생 또한 평소에 즐겨 나오던 동창회 모임에 한동안 뜸했다가 최근 조금씩 얼굴을 비치는 정도라고 했다. 외부 접촉이 줄면서 자연스레 이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이춘재는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 살았다. 그가 살던 곳은 재개발 돼 현재는 아파트와 원룸촌이 들어섰다. 2019년 가을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일대의 한 공인중개사는 “이춘재 엄마가 나이가 있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걸 불편해한다. 떠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성엔 이춘재에게 당한 피해자와 그 유가족뿐만 아니라 경찰에게 당한 피해자와 그 유가족의 아픔도 존재한다. 8차 사건(1988년 9월 7일)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억울하게 옥살이한 윤성여 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윤 씨의 억울함은 재심으로 치러진 공판에서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강압 수사와 허위 자백으로 범인을 만든 셈이다. 윤 씨는 그나마 자신의 무고를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경찰의 강압 수사에 목숨을 잃고 여전히 아무런 위로도 보상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D 씨가 있다. D 씨는 30여 년 전 동생을 잃었다. 스무 살이던 D 씨의 동생은 9차 사건 범인으로 몰렸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동생은 경찰 수사를 받을 때 여관방에서 5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받아주는 진술서를 27번이나 썼다. 마대에 담겨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났지만 동생은 경찰에 맞은 갈비뼈에 육종(뼈에 생기는 종양)이 자랐다. 시름시름 앓다가 27세에 죽었다. 동생 변호사비, 병원비를 대다가 가세도 기울었다. D 씨는 혼기도 놓쳤다(관련기사 [단독] ‘살인의 추억’ 박해일 실제 모델 “경찰 수사 후유증으로 숨졌다”).
이춘재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이었던 반기수 경기남부청 2부장이 2019년 9월 19일 오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본관에서 이춘재연쇄살인사건 브리핑에 앞서 고개를 숙였다. 사진=박정훈 기자
D 씨는 “이춘재가 직접 본인 입으로 자백을 해서 후련하긴 하다”면서도 “정말 그때 경찰들이 처벌받았으면 좋겠다. 그때 아버지가 모아둔 돈을 다 동생 병원비로 썼고, 동생이 죽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때는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대가 끊길 상황이다. 나라가 이런 사정을 알아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화성은 이제 끝났지만, 누군가의 화성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