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다리도 억울한 옥살이도 운명이라 생각… 32년 전 경찰관들 용서한 것도 ‘스스로를 위해서’
윤성여 씨가 32년 간 얽혀있던 잔인한 실타래를 마침내 풀었다. 이춘재 과거 사진과 윤성여 씨 사진 합성. 그래픽=고석희 기자
#너는 필요 없다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본 기억이 없다. 가장 멀리 기억할 수 있는 다섯 살 때로 돌아가 봐도 이미 한 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사촌들과 놀러 다닐 때도, 가을 추수철 깡통을 들고 참새를 쫓으러 다닐 때도 혼자 넘어지기만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꾀를 부린다며 놀리는 동네 형들과 사촌들의 얼굴을 윤 씨는 주저앉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다리가 왜 그런지는 어머니의 설명을 알아들을 나이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세 살 때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노점상을 하며 매일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던 어머니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시간을 내 데려간 병원에선 말없이 혼자 걷게만 했다.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넘어졌다. 어머니는 그때 아들이 소아마비고, 치료가 힘들다는 설명을 들었다.
열 살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도박에 빠져 집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어머니 사고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1년 만에 누나, 동생들과 큰집, 작은집으로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아버지는 친아들처럼 아껴줬지만 어려운 형편에 늘어난 입 하나의 무게는 어린 나이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해,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일을 하기로 했다.
작은아버지가 잘 아는 중식당을 소개 받았다. 잡일도 하고 배달도 하다 보면 요리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루 만에 쫓겨났다. 첫 배달을 가다 넘어졌고 음식을 전부 쏟았다. “너는 우리집에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나와야 했다. 옮겨간 근처 튀김집에선 한 달은 버텼다. 넘어지진 않았다. 대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궁이 위에 기름 솥을 잘못 놨는데, 그게 안방 쪽으로 쏟아지면서 주인집 어린 딸이 데일 뻔했다. 필요 없다는 낯익은 말을 뒤로하고 튀김집을 나왔다.
윤 씨는 작은아버지 댁으로 돌아가는 대신 거리에서 살았다. 노숙 생활을 하던 또래들과 구걸을 했다. 밥 좀 달라며 문을 두드리면 욕설과 몽둥이가 날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혼자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집주인이 “너는 왜 안 도망가냐”고 물으면 ‘헤헤’ 웃으며 “그냥 밥 좀 주세요”하며 한 대 얻어맞고 찬밥을 받았다.
거리 생활이 6개월에 접어들 때 즈음, 농기구 수리센터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작은아버지 지인으로부터 “어린놈이 그렇게 살지 말고 기술 배워서 밥벌이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끌려가다시피 간 곳이지만 윤 씨에겐 마치 새 삶을 주는 구세주로 보였다.
처음 해보는 일에 손도 느리고 무거운 부품은 제대로 들지도 못해 거기서도 매일 맞았다. 뺨을 맞아 눈앞이 번쩍해도, 머리 위로 몽키 스패너가 날아다녀도 받아들이고 참았다.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는 이곳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그렇게 배웠다.
윤 씨는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본 기억이 없다. 가을 추수철 깡통을 들고 참새를 쫓으러 다닐 때도 혼자 넘어지기만 했다. 사진=고석희 기자
농기구 수리센터에서 10년을 지냈다. 한 쪽 다리를 절며 거리 생활하던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됐다. 윤 씨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필요 없단 소리 대신 좋은 평판에 귀한 기술자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살 만하다 했다. 1989년 7월 25일 밤, 경찰이 수리센터에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윤 씨는 2019년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이춘재 대신 수감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왜 자백했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기자들도, 8차 사건을 재조사를 했던 경찰과 검찰도 하지도 않은 일을 왜 했다고 말했냐며 반복해서 묻는다. ‘사람을 죽였다’는 자백의 무게를 생각하면 끝까지 버텼어야 하지 않았냐고 한다.
윤 씨는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말았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스스로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대신 3일 동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던 일, 수치스러운 가혹행위, “얌전히 인정하면 1~2년만 살다 나오게 해주겠다”는 회유, 구치소에서 동료 수감자들이 “재판에서 인정하고 동정 받아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던 일 등, 32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을 설명할 뿐이다.
그날, 윤 씨는 혼자였다. 가족도, 친척도, 친형제와 같았던 농기구센터 사장도 곁에 없었다. “네가 여기서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빡 하는 사람 없다”며 다그치는 경찰들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윤 씨가 그때 본능적으로 떠올린 건, 어쩌면 공포와 불안보다 10년 전 배웠던 ‘살아남는 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윤성여 씨의 삶은 단조롭다. 직장과 집, 성당이 그가 가는 곳의 전부다. 술도 마시지 않고 아주 가까운 지인들 외엔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2009년 출소 이후 지금까지 11년을 이렇게 살고 있다. 하루하루 조용히 해야 할 일을 하면 잘 살다 가는 거라고 했다. 윤 씨의 기도는 한결같다. “오늘도 무사히 보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과자 윤성여’로 살아가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내가 하지 않았다”는 말은 해본 적도 없고, 한다 한들 20여 년을 교도소에서 살고 나온 사람이라는 허물에 막혀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돌리진 않았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되묻는 일도 하지 않았다. 다리도, 20여 년의 옥살이도 그 시대에 살던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내와 순응, 윤성여 씨가 교도소에서 고스란히 가져온 신념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는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 직후 수감생활을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죽일 놈”이라며 쏘아보는 동료 수감자들의 시선은 그나마 참을 만했다. 불편한 한 쪽 다리를 가진 자신이 장애인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금방 받아들였다. 괴로웠던 건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금의 현실, 영원히 이름 앞에 새겨질 유죄의 흔적, 앞날이 없는 무기수의 명찰이었다.
1989년 7월 화성경찰서에서 촬영된 윤성여 씨 다리. 사진=8차 사건 재심 기록
누구도 그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다. 들어주려 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족도, 친척들도 그들의 삶에 치여 찾아오지 않았다. 교도관들에게 재심을 말해봤지만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예민해지니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났다. 시비 붙는 일이 늘어났다. 독방에 다녀오고 나서 싸우고 또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해 살이 붙었다. 몸무게가 100kg을 넘어섰다.
고통 속에서 3년을 보내고 나서야 변화가 시작됐다. 인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동료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기술을 배웠고, 외부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공부를 하고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렀다. 평판이 좋아지면서 교도관에게 위임받아 공장 업무를 총괄하는 반장을 맡게 됐고, 일급수가 돼 감형을 받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들어주질 않고 달라지질 않았다. 생각하고 붙잡고만 있으니 내가 너무 힘들었다.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결백과 상관없이 지금 교도소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래야 했다. 억울함도, 재심에 대한 기대도 전부 허상일 뿐이었다. 무거운 짐을 떨궈 놓는다고 해야 하나. 잠시만 내려놓기로 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윤 씨는 32년 전 자신을 경찰서로 데리고 간 과거 8차 사건 수사 경찰관들을 용서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윤 씨 스스로를 위해서였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면 괴롭고 힘들기만 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교도소에서 성경을 필사했다. 일과를 마치고 틈틈이 적으면서 2년을 보냈다. 윤 씨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전도서 1장 2절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내용이다.
#특별한 성탄절 선물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언제예요? 좋았던 기억이라거나.”
“없어요. 그런 거.”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결심공판을 이틀 앞둔 지난 11월 15일, 마지막 재판을 준비하다 쉬고 있던 윤성여 씨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그는 무심히 답했다. 기억하려 해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행복이란 단어는 언제나 그를 빗겨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모르고 살아왔다고 했다. 지난 12월 17일 무죄 선고 이후 윤 씨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다시 물었다. 그는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기자가 묻는 행복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2020년 12월 17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윤성여 씨.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조만간 면허 시험을 치를 계획이다. 어머니 산소에도 더 자주 가고 싶고, 재심 재판 이후 다시 만난 친척들과의 왕래도 늘리고 싶어서다. 무엇보다 불편한 왼쪽 다리가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아직까진 삶에 큰 변화를 주고 싶진 않다고 했다. 늘 그래왔듯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다만 “언젠가 한번쯤은 브루나이에 가볼 수도 있겠지”라고 넌지시 말했다. 동남아시아에 있는 브루나이는 윤 씨가 교도소에서 TV로 봤던 곳이다.
윤 씨는 오는 성탄절에 특별한 선물을 받는다. 무죄 선고에 따라 전과기록이 말소된다. 절차상 선고 이후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는 12월 24일 서류를 받는다. 32년 동안 그의 이름 앞에 새겨져 있던 유죄의 흔적이 마침내 지워진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